새로운 왕조의 서막, 고려의 멸망과 조선 건국의 길

14세기 말, 고려는 내부의 부패와 외세의 위협 속에서 점차 붕괴의 길을 걸었다. 공민왕의 개혁 이후 잠시 자주적 안정을 되찾는 듯했지만, 왕권은 다시 흔들리고 권문세족과 무장 세력 간의 갈등이 격화되었다. 한편, 사회적으로는 새로운 사상과 계층이 성장하며 새로운 시대를 준비하고 있었다. 이 혼란과 변혁의 중심에서 등장한 인물이 바로 이성계였다. 그는 군사적 지도자이자 정치적 현실주의자로, 결국 고려를 대신해 새로운 왕조 ‘조선’을 세우며 한반도의 질서를 다시 세웠다. 조선의 건국은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사상과 제도, 사회 구조의 근본적 전환을 의미했다.

고려의 쇠퇴와 혼란

공민왕 사후, 고려는 왕권이 급속히 약화되며 정치적 혼란이 심화되었다. 우왕과 창왕 시기에는 권문세족과 무장 세력의 권력 다툼이 심해졌고, 백성들은 전쟁과 수탈에 시달렸다. 왜구의 침입이 잦아지자 국방은 위태로워졌고, 명나라와의 외교 관계도 불안정했다. 이 시기 최영과 이성계가 중심이 되어 왜구를 격퇴하는 등 군사적 대응이 이루어졌지만, 근본적인 체제 개혁은 불가능했다. 결국 고려 말은 정치적 부패와 민심 이반이 극에 달한 시기였다.

요인 내용 영향
정치적 혼란 왕권 약화, 권문세족의 부패 정치 불신, 민심 이반
외세의 위협 왜구의 침입, 명·원 세력의 압박 군사력 소모, 경제 붕괴
사회 변화 신진사대부의 성장, 불교 비판 새로운 정치 이념의 등장
군사적 사건 위화도 회군(1388) 고려 왕조 붕괴의 결정적 계기

위화도 회군과 고려 왕조의 종말

1388년, 최영은 명나라에 빼앗긴 요동을 되찾기 위해 이성계에게 출정을 명령했다. 그러나 이성계는 “요동 정벌은 백성을 해치는 일”이라며 군대를 돌려 개경으로 돌아오는 결단을 내렸다. 이것이 바로 위화도 회군이다. 이 사건은 고려 왕조의 권력 기반을 무너뜨리고, 실질적인 정권의 주인이 이성계로 바뀌는 계기가 되었다. 회군 이후 이성계는 개혁 정치를 추진하며 새로운 왕조 건설을 준비했다.

신진사대부의 이념과 조선 건국

이성계의 새로운 정치 세력에는 정도전, 조준, 남은 등 유교적 이상을 추구한 신진사대부가 있었다. 그들은 부패한 불교 중심의 구체제를 비판하고, 성리학을 국가의 통치 이념으로 내세웠다. 조선은 천명(天命)에 따라 새롭게 세워지는 도덕적 왕조로 인식되었고, 왕권은 유교적 질서 속에서 백성과 조화를 이루는 존재로 재정의되었다. 1392년, 이성계는 고려의 마지막 왕 공양왕을 폐위시키고 조선을 건국하였다.

조선의 건국과 제도적 정비

조선은 건국 초기부터 중앙집권적 체제를 확립하고 유교 정치 이념을 제도화했다. 태조 이성계는 정도전과 함께 경복궁을 건설하고, 한양을 새로운 수도로 정하였다. 또한 과거제를 정비하여 인재를 등용하고, 불교 세력을 축소하는 대신 유교 교육 기관인 성균관을 강화했다. 이러한 개혁은 단순히 정치적 변화가 아니라, 사상과 문화의 전면적 재편이었다.

고려에서 조선으로, 역사적 전환의 의미

조선의 건국은 한반도 역사에서 가장 큰 체제 변화를 상징한다. 고려가 불교적 질서와 귀족 중심 사회였다면, 조선은 유교적 윤리와 관료제 중심의 사회로 나아갔다. 공민왕의 개혁이 그 단초를 열었다면, 조선의 건국은 그 결실이었다. 이성계와 신진사대부는 새로운 국가 이념을 바탕으로 백성 중심의 통치를 지향했으며, 이후 500년간 이어지는 조선 왕조의 기틀을 마련했다.

다음 시대 예고: 태조 이성계에서 태종으로, 조선의 기틀이 완성되다

이제 새로운 왕조가 세워졌다. 다음 글에서는 조선 초기, 태조에서 태종으로 이어지는 중앙집권 체제의 완성과 국가 기반 정비 과정을 다루며, 조선이 어떻게 500년 왕조의 틀을 다졌는지 살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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