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해전, 이순신은 왜 끝까지 추격했나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의 판옥선 13척은 133척의 일본 함대를 상대로 단 한 척도 잃지 않고 승리했다. 비결은 정신력만이 아니었다. 폭 294m의 좁은 물목에서 시속 20km 넘게 흐르는 급류, 그리고 정오를 전후로 방향이 완전히 뒤바뀌는 조류의 타이밍을 정확히 계산한 결과였다. 울돌목의 물길을 모르고는 명량해전을 설명할 수 없다.

표로 보는 명량해전 개요

구분내용
날짜1597년 9월 16일(음력, 양력 10월 25일)
장소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해협(울돌목)
조선 지휘관이순신(삼도수군통제사), 안위, 김응함
일본 지휘관구루시마 미치후사,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조선군 규모판옥선 13척
일본군 규모133척(어란포에서 출항)
결과조선 완승, 구루시마 미치후사 전사, 일본군 서해 진출 저지

왜 하필 울돌목이었나

명량해협은 서해와 남해가 만나는 지점 중 가장 좁고 짧은 물길이다. 폭은 294m에 불과하고, 밀물과 썰물이 바뀔 때마다 물살의 방향이 뒤집힌다. 국립해양조사원이 2010년 재현 실험으로 밝힌 바에 따르면 남쪽에서 밀려온 조류가 이 좁은 목을 통과하는 순간 유속이 평소보다 10배 가까이 빨라져 초속 6.5m에 이르고, 해저의 암초에 부딪힌 물살은 방향을 잃고 소용돌이친다.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궤멸시킨 일본 함대라도, 대형을 갖추기 힘든 이 좁은 급류 안에서는 수적 우위를 온전히 살릴 수 없었다.

9월 16일 새벽, 133척이 다가오다

정유재란으로 전세가 기울던 1597년 9월, 이순신이 칠천량해전 이후 수습한 전력은 판옥선 13척이 전부였다. 9월 16일 이른 아침, 일본 함대 133척이 전라도 어란포를 출발해 명량해협으로 접근했다. 이순신은 전날인 9월 15일 일기(《정유일기》)에 "반드시 죽고자 하면 살고 반드시 살고자 하면 죽는다(必死則生 必生則死)"는 《손자병법》의 구절을 인용해 각오를 다졌다는 기록을 남겼다. 조류가 거의 멎어 있던 이른 아침, 조선 함대는 명량해협 좁은 물목에 일자로 늘어서 일본군의 진입로를 막았다.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

막상 133척이 몰려오자 조선 장수들 사이에서 동요가 일었다. 거제현령 안위와 중군장 김응함의 배가 머뭇거리며 뒤로 물러서자, 이순신은 자신의 대장선을 앞세우고 안위를 향해 "안위야, 군법에 죽고 싶으냐"라고 소리쳐 독려했다. 결국 안위의 배가 홀로 앞으로 나아가 적진 한복판에서 싸웠고, 일본 배 3척이 갈고리로 안위의 배에 달라붙어 승선을 시도하자 이순신이 대장선에서 포격을 퍼부어 이를 저지했다. 이 국면에서 조선 수군의 배는 여전히 13척뿐이었지만, 좁은 물목 덕분에 일본 함대는 한꺼번에 몰려들지 못하고 몇 척씩만 교대로 부딪혀야 했다.

정오, 물길이 완전히 뒤바뀌다

해양수산부와 국립해양조사원이 당시 조류를 복원한 결과에 따르면, 명량해전 당일은 조수 차가 가장 큰 대조기였다. 오전 6시 30분 무렵 물살이 거의 멈추는 정조 상태에서 시작해 이후 북서 방향의 창조류(밀물)가 강해지며 오전 10시 10분경 초속 4.0m의 최강 유속을 기록했다. 이 창조류는 일본 함대가 진입하는 방향과 같았다. 그러나 정오 무렵인 12시 21분경 조류는 남동 방향의 낙조류(썰물)로 완전히 전환됐고, 이때부터 물살은 조선 수군에게 유리하게, 일본 함대에는 불리하게 작용했다. 앞서가던 배들이 밀려드는 물살에 서로 부딪히고 대형이 흐트러지기 시작한 것이 바로 이 시점이다.

구루시마 미치후사의 죽음과 전세 역전

혼전 중 일본 수군장 구루시마 미치후사가 탄 배가 조선 수군에게 나포됐다. 조선군은 갈고리로 그를 끌어올려 목을 벤 뒤 뱃머리에 효수했다. 지휘관의 죽음을 목격한 일본 함대는 동요했고, 낙조류로 전환된 물살까지 겹치면서 진형이 완전히 무너졌다. 이순신은 이 틈을 놓치지 않고 총공격을 명령했다. 도도 다카토라도 이 전투에서 부상을 입었다. 결국 일본 함대는 서른 척 안팎의 배를 잃고 물러났으며, 조선 수군은 단 한 척도 잃지 않았다.

철쇄설, 사실일까

명량해전을 둘러싼 이야기 중에는 이순신이 물목에 쇠사슬을 설치해 일본 배를 좌초시켰다는 이른바 철쇄설도 있다. 그러나 이 이야기가 처음 등장하는 문헌은 전투로부터 160년가량 지난 뒤 쓰인 《택리지》와 《호남절의록》으로, 정작 이순신 자신의 《난중일기》에는 관련 기록이 전혀 없다. 칠천량 궤멸 직후 통제사에 재임명된 이순신에게 대규모 쇠사슬을 만들 시간과 인력이 있었을지도 의문이다. 국내 학계에서는 이런 이유로 철쇄설에 회의적인 시각이 우세하며, 명량해전의 승인은 쇠사슬이 아니라 지형과 조류를 정확히 계산한 전술이었다는 쪽에 무게가 실린다.

명량해전 이후

명량에서 서해 진출이 완전히 막히자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났다. 이순신은 이후 진영을 고군산도, 이어 고금도로 옮기며 수군을 재건했고,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과 연합 함대를 꾸렸다. 이 전력은 1598년 12월 노량해전에서 퇴각하는 일본군을 가로막는 데 다시 쓰인다. 칠천량에서 궤멸했던 조선 수군이 불과 두 달 만에 전세를 역전시킨 배경에는 이런 지형과 물때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있었다. 32세 늦깎이 무관에서 이런 전술가로 성장하기까지의 과정은 이순신의 생애와 전술에, 명량해전이 임진왜란 전체에서 차지하는 위치는 임진왜란 전투 순서, 부산진부터 노량까지에 정리해뒀다.

자주 묻는 질문

Q1. 명량해전에서 조선 수군의 배는 정말 13척뿐이었나?

그렇다. 배설이 칠천량에서 수습한 12척에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 1척이 합류해 13척이 됐다. 정찰용 소형 선박인 초탐선이 별도로 있었지만 전투를 감당할 수 있는 배는 이 13척뿐이었다.

Q2. 울돌목이라는 이름은 어디서 왔나?

물살이 암초에 부딪히며 소용돌이치는 소리가 마치 짐승이 우는 소리처럼 들린다고 해서 '울돌목(鳴梁)'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한자 그대로도 '우는 물목'이라는 뜻이다.

Q3. 명량해전 이후 이순신은 어디로 이동했나?

고군산도를 거쳐 완도 앞바다의 고금도로 진영을 옮겼다. 이곳에서 명나라 수군과 연합 함대를 꾸려 전력을 재건했고, 1598년 노량해전까지 이 진영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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