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자호란 전개 과정, 청군 침입부터 삼전도까지

임진왜란이 끝난 지 40년도 되지 않아 조선은 또 다른 전쟁을 맞았다. 이번 상대는 새로 일어난 청나라였다. 1636년 12월 압록강을 건넌 청군은 단 열흘 만에 한양 코앞까지 밀고 들어왔고, 인조는 남한산성에 갇혀 45일을 버티다 삼전도에서 무릎을 꿇었다. 병자호란은 임진왜란처럼 오래 끈 전쟁이 아니라, 두 달 만에 승부가 난 짧고 참혹한 항복의 기록이다.

표로 보는 병자호란 전개

날짜사건
1636.12.28청 태종, 약 1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 도하
1637.1.10(음 12.14 무렵)인조, 강화도 피란길 막혀 남한산성으로 급히 대피
1637.1.10 전후한성, 청군에 함락
1637.1.22청군, 강화도 상륙 및 강화산성 함락
1637.1.30인조, 삼전도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삼배구고두례)

왜 청은 조선을 다시 침략했나

후금(뒤의 청)은 1627년 정묘호란으로 이미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은 상태였다. 그런데 세력을 키운 청 태종 홍타이지가 황제를 자칭하며 조선에 군신 관계, 즉 신하로서 복종할 것을 요구하자 조선 조정은 이를 거부했다. 명나라와의 의리를 중시하는 척화론이 조정 여론을 주도했기 때문이다. 청 태종 입장에서는 명나라를 본격적으로 공략하기 전에 배후의 조선을 확실히 굴복시켜 둘 필요가 있었다. 이 판단이 1636년 12월의 전면 침공으로 이어졌다. 조선 조정 내에서도 청의 요구를 일부 수용하자는 현실론이 없지 않았지만, 병자호란 발발 직전까지 강경한 척화 여론이 정책을 압도하면서 외교적 완충의 여지를 스스로 좁혀버렸다.

열흘 만에 무너진 방어선

청군은 12월 28일 약 10만 명의 병력으로 압록강을 건넌 뒤 조선의 방어 거점들을 우회하며 빠르게 남하했다. 애초 조정은 정묘호란 때처럼 강화도로 피란해 장기전을 준비할 계획이었지만, 청 기병의 진격 속도가 예상을 뛰어넘으면서 강화도로 가는 길이 막혀버렸다. 결국 인조와 조정은 급히 방향을 돌려 남한산성으로 피신했고, 뒤이어 한성이 청군의 손에 넘어갔다. 전쟁이 시작된 지 채 열흘도 되지 않아 조선의 수도가 함락된 셈이다.

남한산성, 45일의 고립

남한산성에 들어간 인조와 신료, 병사들은 청군에게 완전히 포위됐다. 추위와 굶주림이 가장 큰 적이었다. 지방에서 왕을 구하러 올라오던 근왕병도 청군에게 각지에서 격파되며 큰 도움이 되지 못했다. 성 안에서는 척화론과 주화론이 첨예하게 부딪쳤다. 예조판서 김상헌 등은 끝까지 싸우거나 죽음으로 절의를 지켜야 한다고 주장했고, 이조판서 최명길 등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기 위해 현실적인 강화가 불가피하다고 맞섰다. 고립이 길어지고 1월 22일 왕실 가족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됐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항전을 지속할 명분과 여력이 모두 사라졌다.

근왕병의 잇단 패배와 강화도 함락

남한산성을 구하기 위해 전국 각지에서 근왕병이 올라왔지만 성과는 참혹했다. 경상좌병사 허완과 경상우병사 민영이 이끈 부대는 경기도 광주 쌍령에서 청군과 맞붙었는데, 허완의 부대는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무너졌고 민영은 끝까지 항전하다 전사했다. 각지에서 올라오던 다른 근왕병들도 비슷한 운명을 겪으며 남한산성 포위를 풀지 못했다. 설상가상으로 1월 22일에는 왕실 가족과 신료들이 피신해 있던 강화도마저 함락됐다. 강화성을 지키던 김상용은 성이 무너지자 화약더미에 불을 놓아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와 함께 있던 많은 관리와 부녀자들도 목숨을 잃었다. 근왕병의 패배와 강화도 함락이라는 두 소식이 겹치면서 남한산성 안의 항전 의지는 완전히 꺾였다.

삼전도의 항복

1637년 1월 30일, 인조는 남한산성을 나와 삼전도(지금의 서울 송파 인근)에서 청 태종에게 항복했다. 이때 인조가 행한 의식이 삼배구고두례, 즉 세 번 절하고 절할 때마다 세 차례씩 머리를 땅에 찧는 굴욕적인 의례였다. 척화를 주장했던 홍익한·윤집·오달제, 이른바 삼학사는 청에 끌려가 처형됐고, 김상헌도 뒤에 붙잡혀 오랜 옥살이를 했다. 인조의 두 아들인 소현세자와 봉림대군은 청의 수도 심양에 인질로 끌려가 이후 8~9년간 볼모 생활을 하게 된다.

병자호란이 남긴 것

병자호란은 군사적 패배 이상의 상처를 남겼다. 조선은 청과 군신 관계를 맺고 명과의 외교를 끊어야 했으며, 청 태종의 공덕을 기리는 비석(삼전도비)을 스스로 세워야 하는 수모까지 겪었다. 그럼에도 조선 지배층 사이에서는 명에 대한 의리를 지키지 못했다는 자책과, 청에 당한 치욕을 씻어야 한다는 정서가 오래 이어져 훗날 북벌론으로 이어진다. 짧았던 전쟁이 남긴 정치적 여진은 그 뒤로도 수십 년간 계속됐다.

자주 묻는 질문

Q1. 병자호란과 정묘호란은 어떻게 다른가?

1627년 정묘호란은 후금이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는 선에서 끝났다. 병자호란은 그로부터 9년 뒤 황제를 칭한 청이 '군신 관계'로의 완전한 복속을 요구하며 벌인 전면 침공으로, 결과도 조선의 항복으로 끝났다는 점에서 훨씬 더 굴욕적이었다.

Q2. 삼전도비에는 뭐라고 적혀 있나?

정식 명칭은 '대청황제공덕비'로, 청 태종의 공덕을 칭송하는 내용이 한자·만주문자·몽골문자 세 가지 문자로 새겨져 있다. 조선이 패전의 대가로 스스로 세운 비석이다.

Q3. 소현세자는 심양에서 어떻게 지냈나?

봉림대군과 함께 8~9년간 인질로 지내며 청의 문물을 접했다. 1645년 귀국했지만 두 달 만에 갑작스럽게 사망해 독살설을 비롯한 여러 의문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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