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두 차례 백의종군을 겪었다. 그중 결정적인 것은 1597년, 부산 왜영 공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죄인 신분으로 전장을 떠돈 사건이다. 그런데 왜 조정은 불과 몇 달 뒤 그를 다시 통제사로 불러들였을까. 답은 칠천량 참패로 대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짓 정보에서 시작된 파직
1597년 초,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첩 요시라를 통해 조선에 "가토 기요마사가 특정 날짜에 바다를 건너올 것"이라는 거짓 정보를 흘렸다. 조정은 이를 믿고 이순신에게 부산 앞바다로 출정해 가토를 요격하라 명령했다. 이순신은 정보의 신빙성이 낮고 지형상 매복 위험이 크다고 판단해 명령을 따르지 않았다.
한양 압송과 고문
선조는 이를 항명으로 간주했고, 1597년 2월 이순신은 한양으로 압송되어 의금부에서 문초를 받았다. 정탁 등 대신들의 만류로 사형은 면했지만, 관직을 박탈당하고 도원수 권율 휘하에서 백의종군하라는 처분을 받았다. 이 시기 이순신은 어머니의 부고를 전장에서 접하기도 했다.
칠천량 참패, 상황이 뒤바뀌다
후임 통제사 원균이 1597년 7월 칠천량해전에서 함대 대부분을 잃고 전사하자, 조정은 급히 대안을 찾아야 했다. 남은 전력은 배설이 이끌고 나온 판옥선 12척뿐이었다. 이 위기 속에서 선조는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임명했다.
| 시기 | 사건 |
|---|---|
| 1597년 2월 | 부산 출정 거부로 파직, 한양 압송 |
| 1597년 4월 | 백의종군 시작, 권율 휘하 배속 |
| 1597년 7월 16일 | 칠천량해전, 원균 전사 |
| 1597년 8월 3일 | 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 교서 도착 |
"신에게는 아직 12척이 있습니다"
복직 직후 이순신은 남은 전력의 현황을 조정에 보고했다. 이때 올린 장계에 담긴 표현이 이후 명량해전을 상징하는 문구로 널리 알려졌다. 그는 수군을 폐지하고 육전에 합류하라는 조정의 지시에도 반대하며, 바다를 포기하면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이 기록은 이충무공전서에 실려 있다.
복직 이후의 행보
통제사로 돌아온 이순신은 흩어진 병력과 백성을 수습하며 함대를 재건했다. 판옥선 12척에 1척을 더해 13척을 확보한 그는 곧이어 명량 해협에서 133척에 달하는 일본 함대와 맞서게 된다. 백의종군에서 복직까지 걸린 기간은 약 6개월이었다.
자주 묻는 질문
- Q. 이순신은 왜 파직됐나?
A. 고니시 유키나가가 흘린 거짓 정보를 근거로 한 부산 출정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파직됐다. - Q. 백의종군은 무슨 뜻인가?
A. 관직 없이 흰옷을 입은 평민 신분으로 군무에 종사하는 처벌을 뜻한다. - Q. 이순신은 왜 다시 통제사가 됐나?
A. 후임 원균이 칠천량해전에서 대패하고 전사하면서 조선 수군을 지휘할 대안이 없었기 때문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