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4월 14일 부산진에서 시작해 1598년 11월 19일 노량에서 끝난 전쟁, 임진왜란은 만 6년 7개월 동안 이어졌다. 이 기간 조선 팔도에서 크고 작은 전투가 수백 차례 벌어졌지만, 전쟁의 흐름을 바꾼 전투는 열 곳 남짓으로 좁혀진다. 아래 표와 연표를 따라가면 초반 궤멸 → 이순신의 해상 반격 → 진주성·평양성 공방 → 정유재란 → 노량으로 이어지는 7년의 궤적이 한눈에 들어온다.
표로 먼저 보는 임진왜란 10대 전투
| 순서 | 날짜 | 전투명 | 조선 측 지휘관 | 결과 |
|---|---|---|---|---|
| 1 | 1592.5.24(음 4.14) | 부산진 전투 | 정발 | 패전, 정발 전사 |
| 2 | 1592.5.25(음 4.15) | 동래성 전투 | 송상현 | 패전, 송상현 전사 |
| 3 | 1592.6.7(음 4.28) | 탄금대 전투 | 신립 | 대패, 신립 전사 |
| 4 | 1592.8.14 | 한산도대첩 | 이순신 | 대승, 학익진 |
| 5 | 1592.11(음 10월) | 제1차 진주성 전투 | 김시민 | 수성 성공 |
| 6 | 1593.2.9(음 1.9) | 평양성 탈환 | 조명연합군 | 탈환 성공 |
| 7 | 1593.3.14 | 행주대첩 | 권율 | 대승 |
| 8 | 1593.6.29(음) | 제2차 진주성 전투 | 김천일·최경회·황진 | 함락 |
| 9 | 1597.9.16 | 명량해전 | 이순신 | 대승 |
| 10 | 1598.12.16(음 11.19) | 노량해전 | 이순신 | 승리, 이순신 전사 |
1592년 4월, 부산진과 동래성이 무너지다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일본군 선봉대 18,700명은 1592년 5월 23일(음력 4월 13일) 오전 8시 쓰시마 이즈하라를 출발해 700여 척의 배로 부산 앞바다에 도착했다. 이튿날인 5월 24일 새벽, 일본군은 부산진성을 포위했고 부산진첨사 정발은 서문을 사수하다 정오 무렵 조총에 맞아 전사했다. 성이 함락되자 일본군은 곧바로 북상해 5월 25일 동래성을 공격했다. 동래부사 송상현은 "싸워 죽기는 쉬우나 길을 빌리기는 어렵다(戰死易 假道難)"는 답서를 남기고 두 시간여 항전 끝에 전사했다. 이 두 전투로 조선은 개전 이틀 만에 부산과 동래를 모두 내주었다.
충주 탄금대, 신립의 배수진과 한양 함락
도순변사 신립은 조정이 동원할 수 있는 마지막 정예 기병을 이끌고 충주로 내려왔다. 문경새재(조령)의 험지를 버리고 탄금대 앞 벌판에 배수진을 친 것이 패인이 됐다. 1592년 6월 7일(음력 4월 28일),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와 맞붙은 조선군은 강을 등지고 싸우다 퇴로가 막혀 궤멸했고 신립도 강물에 몸을 던져 전사했다. 탄금대 패전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는 한양을 버리고 평양으로, 다시 의주로 피란길에 올랐다. 일본군은 1592년 7월(음력 6월) 평양성까지 무혈에 가깝게 점령하며 개전 두 달 만에 조선 강토 대부분을 손에 넣었다.
한산도대첩, 이순신이 전세를 바꾸다
육상에서 연패가 이어지던 그때, 흐름을 뒤집은 것은 바다였다. 1592년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은 판옥선과 거북선 55척을 이끌고 와키자카 야스하루가 지휘하는 일본 함대 73척(대선 36척, 중선 24척, 소선 13척)과 맞섰다. 좁은 견내량에서 적을 넓은 한산도 바다로 유인한 뒤 학이 날개를 편 모양으로 함대를 펼치는 학익진으로 포위해 십자포화를 퍼부었다. 이 전투에서 일본군은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선 7척을 잃고 3천여 명이 전사했으며, 겨우 14척만 탈출했다. 《난중일기》에도 이날의 전황이 기록돼 있으며, 한산도대첩은 진주대첩·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진주성을 지킨 김시민, 제1차 진주성 전투
한산도대첩으로 남해 제해권을 잃자 일본군은 육로로 호남 곡창지대를 노리며 진주성을 공격 목표로 삼았다. 1592년 음력 10월, 일본군 3만여 명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성을 지킨 것은 진주목사 김시민이 이끄는 관군과 의병 3,800여 명뿐이었다. 화포와 돌, 끓는 물을 동원한 항전이 엿새 가까이 이어졌고 결국 일본군은 성을 함락하지 못한 채 물러났다. 김시민은 전투 막바지 이마에 총상을 입었고, 이 상처로 얼마 뒤 세상을 떠났다. 조정은 그의 공을 기려 사후 충무공에 준하는 예로 대우했다.
평양성 탈환과 행주대첩, 전세가 완전히 뒤집히다
명나라는 1593년 1월 제독 이여송에게 4만 3천 명의 병력을 주어 조선에 파병했다. 조선군 도원수 김명원의 8천 병력과 서산대사·사명대사가 이끈 승병 2,200명이 여기에 합류했다. 조명연합군은 1593년 2월 9일(음력 1월 9일) 평양성을 탈환했고, 고니시 유키나가의 부대는 한양으로 후퇴했다. 한 달여 뒤인 3월 14일, 전라도순찰사 권율은 서울 탈환을 노리고 한강 이북 행주산성에 진을 쳤다. 병력은 2,300~3,800명 수준에 불과했지만 화차와 신기전, 천자총통으로 무장해 3만 명에 달하는 일본군의 총공세를 하루 만에 격퇴했다. 행주대첩은 진주대첩·한산도대첩과 나란히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불린다.
제2차 진주성 전투, 진주성이 함락되다
1차 진주성 전투에서 패한 것을 앙갚음하려는 듯,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진주성을 완전히 짓밟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1593년 음력 6월 22일부터 29일까지 9만~10만에 이르는 일본 대군이 진주성을 포위했다. 창의사 김천일, 경상우병사 최경회, 충청병사 황진 등 이른바 삼장사(三壯士)가 이끄는 병력 6천~7천 명과 성안으로 피란해 있던 백성 6만여 명이 함께 맞섰다. 아흐레에 걸친 공방 끝에 6월 29일 성벽이 무너졌고 진주성은 함락됐다. 관기 논개가 촉석루 연회에서 일본 장수 게야무라 로쿠스케를 끌어안고 남강에 투신한 일화도 이때 벌어졌다.
정유재란과 명량해전의 기적
1596년 강화 협상이 결렬되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1597년 다시 대군을 보냈다. 정유재란이다. 이순신은 모함으로 파직됐다가 원균이 칠천량에서 조선 수군을 거의 전멸시킨 뒤에야 삼도수군통제사로 복귀했다. 그가 물려받은 전력은 판옥선 13척이 전부였다. 1597년 9월 16일, 이순신은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 좁은 명량 해협의 거센 물살을 이용해 133척 규모의 일본 함대를 맞았다. 좁은 물목에서는 소수의 배로도 다수를 상대할 수 있다는 점을 이용한 전술이었고, 결과는 조선 수군의 완승이었다. 이 승리로 일본군의 서해 진출 계획은 완전히 무산됐다.
노량해전, 이순신의 마지막 전투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면서 일본군은 전면 철수를 시작했다. 이순신은 퇴각하는 적을 그냥 보내지 않았다. 1598년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조명연합수군은 경상도 남해 노량해협에서 철수하던 일본 함대를 가로막았다. 격전 중 이순신은 관음포 인근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고, "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두었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의 마지막 전투이자 7년 전쟁의 종지부였다.
자주 묻는 질문
Q1. 임진왜란은 몇 년간 이어졌나?
1592년 5월(음력 4월) 부산진 전투로 시작해 1598년 12월(음력 11월) 노량해전으로 끝났다. 중간에 명과 일본 사이 강화 협상 기간(1594~1596년)이 있었고, 협상 결렬 뒤 벌어진 1597년 이후 전쟁을 따로 정유재란으로 구분하기도 한다.
Q2. 임진왜란 3대 대첩은 무엇인가?
한산도대첩(1592.8.14), 진주대첩(제1차 진주성 전투, 1592.11), 행주대첩(1593.3.14)을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는다. 세 전투 모두 조선군이 수적 열세를 뒤집고 승리했다는 공통점이 있다.
Q3. 이순신이 직접 지휘한 해전은 어떤 순서였나?
옥포해전(1592.5)을 시작으로 사천·당포·한산도(1592.8)를 거쳐 명량해전(1597.9), 마지막 노량해전(1598.12) 순으로 이어진다. 이 중 한산도대첩과 명량해전이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승리로 꼽힌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