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순신 생애와 전술, 무과 급제부터 노량까지

32세에야 무과에 급제해 변방을 떠돌던 무관이 어떻게 해전 23전 전승에 가까운 기록을 남겼을까. 답은 두 가지다. 하나는 학익진으로 대표되는 포위 전술이고, 다른 하나는 지형과 물살을 읽는 눈이다. 1545년 한성에서 태어나 1598년 노량 앞바다에서 눈을 감기까지, 이순신의 53년은 늦은 출발과 거듭된 좌천, 그리고 몇 번의 결정적 승리로 요약된다.

이순신의 생애를 무과 급제부터 노량해전까지 연대순으로 정리한 연표 인포그래픽

표로 먼저 보는 이순신 생애

시기사건비고
1545.4.28(음 3.8)한성 건천동 출생덕수 이씨
1576.3.22식년시 무과 급제(32세)병과 4등, 훈련원 봉사
1591전라좌도수군절도사 임명(47세)류성룡 천거, 거북선 건조
1592.5.7옥포해전임진왜란 첫 승리
1592.5.29사천해전거북선 첫 실전 투입
1592.8.14한산도대첩학익진, 3대 대첩
1593.8.15삼도수군통제사 임명3도 수군 통합 지휘
1597.2파직·백의종군원균의 모함
1597.7.16칠천량해전(원균 지휘)조선 수군 궤멸
1597.8.3삼도수군통제사 재임명남은 배 12척
1597.9.16명량해전13척으로 133척 격파
1598.12.16(음 11.19)노량해전, 전사전쟁 종결
1604선무공신 1등 추봉덕풍부원군, 증 좌의정

32세 늦깎이 급제, 변방을 떠돈 무관 시절

이순신은 22세이던 1566년 무예 수련을 시작했지만 실제 급제는 1576년, 32세가 되어서였다. 선조 9년 3월 22일 치러진 식년시 무과에서 병과 4등으로 합격해 종9품 훈련원 봉사로 첫 관직에 올랐다. 이후 함경도 동구비보 권관, 전라도 발포진 수군만호, 함경도 조산보 만호를 거치며 변방을 전전했다. 1587년 녹둔도 둔전관을 겸하던 시절 여진족의 기습으로 병사를 잃은 책임을 지고 백의종군한 적도 있는데, 이는 1597년의 두 번째 백의종군과 구분해야 한다. 15년 넘는 세월을 승진 없이 보낸 셈이다.

전라좌수사 부임, 거북선을 만들다

전환점은 1591년이었다. 좌의정 류성룡의 천거로 이순신은 정3품 당상관 전라좌도수군절도사에 발탁됐다. 47세, 무관치고는 늦은 출세였지만 시간은 딱 1년 남짓 남아 있었다. 여수 좌수영에 부임한 그는 판옥선을 정비하고 화포를 늘리는 한편, 거북선 건조에 착수했다. 거북선은 갑판을 판자로 덮고 그 위에 칼과 송곳을 꽂아 적의 승선을 막았으며, 뱃머리에 용머리 모양 총구를 달아 포격이 가능했다. 일본 측 기록과 서구 학자들의 연구에서 세계 최초의 철갑선 중 하나로 언급되기도 한다.

옥포에서 한산도까지, 첫해의 연승

1592년 5월 7일 옥포해전에서 이순신은 임진왜란 첫 승리를 거뒀다. 이어 5월 29일 사천해전에서 거북선을 처음 실전에 투입해 위력을 입증했다. 여기까지는 서전이었다. 진짜 승부는 8월 14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갈렸다. 견내량의 좁은 물목에 머물던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함대 73척을 넓은 바다로 유인한 뒤,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으로 함대를 배치하는 학익진으로 포위해 섬멸했다. 이 전투로 일본군은 47척을 잃고 3천여 명이 전사했다.

한산도대첩에서 사용된 학익진 전술을 도식화한 개념도, 조선 함대가 반원형으로 일본 함대를 포위하는 모습

학익진, 이순신 전술의 핵심

학익진은 단순한 진형이 아니라 지형과 조류를 계산에 넣은 유인·포위 전술이었다. 좁은 견내량에서는 판옥선의 기동이 제한되고 자칫 육지로 상륙한 적에게 역포위당할 위험이 있었다. 이순신은 일부러 후퇴하는 척하며 적을 넓은 한산도 바다로 끌어낸 다음, 반원형으로 함대를 펼쳐 사방에서 화포를 집중시켰다. 5년 뒤 명량에서도 같은 원리가 응용된다. 다만 무대는 좁은 물목이 아니라 하루에도 몇 차례 방향이 바뀌는 울돌목의 급류였다는 점이 다르다.

삼도수군통제사, 그리고 원균과의 갈등

1593년 8월 15일 조정은 경상·전라·충청 3도의 수군을 통합 지휘하는 삼도수군통제사직을 신설하고 이순신을 그 자리에 앉혔다. 문제는 원균이었다. 이순신보다 나이가 많고 경상우수사로 먼저 전장에 나와 있던 원균은 지휘 체계에서 이순신 아래에 놓인 것에 불만을 품었고, 두 사람의 갈등은 조정에까지 보고됐다. 《난중일기》 곳곳에는 이순신이 원균의 처사를 못마땅해하는 대목이 남아 있다. 이 갈등은 훗날 이순신의 파직에도 영향을 미쳤다.

백의종군과 칠천량의 참패

1597년, 일본의 이간계에 걸려든 조정은 부산 방면 출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이순신을 파직하고 한성으로 압송했다. 죽음 직전까지 몰렸다가 도원수 권율 밑에서 두 번째 백의종군에 들어갔다. 통제사 자리를 이어받은 원균은 그해 7월 16일 칠천량에서 일본 수군에게 궤멸에 가까운 패배를 당하고 전사했다. 조선 수군은 사실상 소멸했다. 다급해진 조정은 8월 3일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불러들였다.

12척의 배와 명량의 기적

이순신이 인계받은 전력은 배설이 이끌고 온 판옥선 12척뿐이었다. 8월 15일 무렵 수군 폐지론이 나오자 그는 선조에게 "금신전선 상유십이(今臣戰船尙有十二), 신에게는 아직 열두 척의 전선이 있사옵니다"라는 장계를 올려 수군 유지를 관철시켰다.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 1척이 합류해 실전 병력은 13척이 됐다. 9월 16일, 이순신은 전남 해남과 진도 사이 명량 해협의 거센 조류를 이용해 133척 규모의 일본 함대를 상대로 완승을 거뒀다. 좁은 물목에서는 대형을 갖추기 어렵다는 점, 그리고 시간마다 방향이 바뀌는 물살을 아군에게 유리한 시점에 활용한 결과였다.

노량해전과 마지막 순간

명량 이후 이순신은 고금도로 진영을 옮기고 명나라 수군 제독 진린과 연합 함대를 꾸렸다.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며 일본군은 철수를 서둘렀다. 이순신은 퇴각로를 열어주지 않았다. 12월 16일(음력 11월 19일) 노량해협에서 벌어진 마지막 해전 중, 그는 관음포 인근에서 적의 총탄에 맞아 쓰러졌다. "싸움이 급하다. 내 죽음을 알리지 말라"는 말을 남기고 숨을 거뒀다는 기록이 전한다. 조정은 1604년 그를 선무공신 1등 덕풍부원군에 추봉하고 증 좌의정을 내렸으며, 1793년 정조 때 다시 영의정이 더해졌다.

난중일기, 지휘관이 남긴 기록

이순신은 전쟁 기간 거의 매일 일기를 남겼다. 이 기록이 《난중일기》로, 1962년 국보 제76호로 지정됐고 2013년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됐다. 전투 상황뿐 아니라 날씨, 지형, 병사와 백성의 삶까지 담고 있어 임진왜란 연구의 1차 사료로 꼽힌다. 현재 8권 중 7권의 친필본이 충남 아산 현충사에 보관돼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이순신은 왜 무과 급제가 늦었나?

22세에 무예를 시작해 여러 차례 시험에 응시했고, 1572년 훈련원 별과 시험 중 낙마 사고로 다리를 다쳐 낙방한 일도 있었다. 결국 1576년, 32세에 식년시 무과에 병과로 급제했다.

Q2. 이순신이 참여한 해전은 몇 번이나 되나?

옥포·합포·적진포(1592.5), 사천·당포·당항포·율포(1592.6), 한산도·안골포(1592.7~8), 부산포(1592.9), 명량(1597.9), 노량(1598.12) 등 크고 작은 해전에서 대부분 승리했다. 정확한 횟수는 사료마다 다르게 집계되지만 큰 패배 없이 전승에 가까운 기록을 남긴 점은 공통적으로 확인된다.

Q3. 거북선은 명량해전에도 참전했나?

아니다. 거북선은 칠천량해전에서 조선 수군 전체가 궤멸할 때 함께 소실된 것으로 추정된다. 명량해전 당시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판옥선 13척뿐이었고 거북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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