칠천량해전, 원균은 왜 궤멸했나

임진왜란 5년 동안 단 한 번도 뚫리지 않던 조선 수군의 제해권은 1597년 7월 16일 새벽 단 몇 시간 만에 사라졌다. 칠천량해전이다. 판옥선 100여 척과 수군 1만여 명이 하룻밤 사이 사라진 이 패전은 단순한 지휘관 교체의 결과가 아니다. 무리한 출전 명령, 준비되지 않은 진영, 그리고 일본 수군의 치밀한 기만술이 겹쳐 만든 참사였다.

1597년 2월부터 7월 16일까지 칠천량해전으로 이어지는 사건을 정리한 연표 인포그래픽

표로 보는 칠천량해전 개요

구분내용
날짜1597년 7월 16일(정유재란 중)
장소경상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 칠천량 해협
조선 지휘관원균(삼도수군통제사), 이억기, 최호
일본 지휘관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
조선군 규모전선 100~180척(사료마다 집계 상이), 수군 약 1만 명
결과전선 대부분 상실, 병력 7천여 명 전사, 원균·이억기·최호 전사
생존 전력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끈 전선 12척

왜 이순신이 아니라 원균이었나

원균과 이순신의 악연은 1592년 5월 옥포해전 직후 시작됐다. 두 사람은 각자 조정에 승전 장계를 올리며 공을 다퉜고, 이순신은 원균 휘하 병사들이 이미 노획한 일본 배를 활로 빼앗아가며 아군 부상자를 낸 사건을 문제 삼았다. 원균은 이순신보다 다섯 살 많고 무관 경력도 앞섰지만, 정작 관작은 이순신이 더 높았다. 《난중일기》에는 1593년부터 원균에 대한 불만이 반복해서 등장한다. 1597년 일본이 반간계로 이순신을 부산 출격에 응하지 않았다는 죄목으로 몰아 하옥시키자, 조정은 그 자리에 원균을 삼도수군통제사로 앉혔다. 이순신이 32세 늦깎이로 무과에 급제해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르기까지의 과정은 이순신의 생애와 전술에서 더 자세히 다뤘다.

수륙병진작전의 좌절과 권율의 곤장

통제사가 된 원균도 막상 지휘봉을 잡자 이순신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왜성이 늘어선 부산 앞바다로 정면 돌격하는 것은 무리라는 판단이었다. 그래서 1597년 3월 29일 그는 안골포와 가덕도의 일본군 거점을 육군과 수군이 함께 협공하는 수륙병진작전을 조정에 건의했다. 하지만 도원수 권율이 반대 장계를 올렸고, 도체찰사 이원익은 6월 10일 육군 지원 없이 수군 단독으로 부산 앞바다를 봉쇄하는 해로차단 전술을 채택했다. 조정은 이 명령을 따르지 않으면 군법으로 다스리겠다고 원균을 압박했다. 결국 원균은 6월 18일 자신의 뜻과 무관하게 가덕도로 첫 출진했고, 이튿날 안골포·가덕도 전투에서 별다른 전과 없이 물러났다. 7월 7일에는 웅천에서 일본 배 10여 척을 격파했지만 증원군이 몰려오자 다시 한산도로 후퇴했다. 이 후퇴를 문제 삼은 권율은 7월 11일 원균을 경남 곤양으로 불러 곤장을 쳤고, 원균에게는 더 이상 물러설 여지가 없었다.

가덕도의 비극, 예고된 참사

곤장을 맞은 뒤 다시 바다로 나선 원균의 함대는 7월 14일 절영도(부산 영도) 앞바다에서 일본 수군과 맞붙었다. 일본군은 정면 승부 대신 치고 빠지기를 반복해 조선 수군을 지치게 만들었고, 설상가상으로 거센 풍랑까지 겹쳐 전선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원균은 남은 배를 수습해 가덕도로 물러났는데, 갈증에 시달리던 병사들이 앞다퉈 배에서 내려 물을 마시던 순간 매복해 있던 일본군이 기습해 400여 명이 그 자리에서 목숨을 잃었다. 공교롭게도 같은 해 2월, 이순신이 통제사이던 시절에는 물 길으러 갔던 병사 5명이 붙잡히자 배 62척과 육군까지 동원해 무력시위를 벌인 일이 있었다. 지휘관의 대응 방식이 극명하게 갈린 두 장면이다. 물자도 병사의 사기도 이미 바닥난 상태로, 원균의 함대는 7월 15일 영등포를 거쳐 칠천량에 이르러 정박했다.

칠천량해전에서 일본 수군이 조선 함대를 야간에 기습하는 장면을 그린 삽화

7월 15일 밤, 일본군의 기습

도도 다카토라, 와키자카 야스하루, 가토 요시아키가 이끄는 일본 수군 장수들은 7월 14일 거제도 북쪽으로 함대를 이동시켰다. 조선 수군이 경계를 늦춘 사이, 15일 달밤을 틈타 수륙양면 기습을 개시했다. 좁은 칠천량 해협에 밀집해 정박해 있던 조선 함대는 진형을 갖출 틈도 없이 화공과 근접전에 그대로 노출됐다. 한산도대첩에서 이순신이 활용했던 넓은 바다와 학익진 대형은 이곳에 없었다.

궤멸, 원균의 죽음과 배설의 탈출

몇 겹으로 포위당한 조선 함대는 힘껏 맞섰지만 중과부적이었다. 《선조수정실록》은 경상우수사 배설이 먼저 달아나자 나머지 함대도 걷잡을 수 없이 무너졌다고 전한다. 전라우수사 이억기와 충청수사 최호도 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원균은 일부 병력을 이끌고 추원포로 상륙해 몸을 피하려 했으나 뒤쫓아온 일본군에게 붙잡혀 전사했다. 향년 58세였다. 먼저 이탈했던 배설은 전선 12척을 수습해 남해 방면으로 후퇴하는 데 성공했고, 역설적으로 이 12척이 두 달 뒤 명량해전에서 이순신과 함께 133척의 일본 함대에 맞서는 주력이 된다.

칠천량해전 전후 조선 수군의 전선과 병력 손실을 비교한 막대그래프

원균은 정말 무능했나

칠천량 패전 이후 원균은 오랫동안 무능하고 시기심 많은 장수로 그려졌다. 이순신의 《난중일기》에는 원균의 술주정과 여색, 모함을 성토하는 대목이 80회 넘게 등장하고, 류성룡의 《징비록》도 그를 무능한 술주정뱅이로 묘사한다. 하지만 두 기록 모두 이순신 쪽 인사가 남긴 것이라는 한계가 있다. 역사 저술가 이기환은 2025년 경향신문 칼럼에서 《선조실록》의 어전회의 기록을 근거로 원균을 다시 짚었는데, 이에 따르면 원균은 1597년 3월 부산 정면 돌파 대신 안골포·가덕도를 육군과 함께 협공하는 수륙병진작전을 조정에 제안했지만 도원수 권율의 반대로 무산됐다. 결국 자신이 원치 않던 단독 출전 명령을 따르다 곤장까지 맞고 떠밀리듯 바다로 나선 정황은 원균 개인의 실책만으로 패전을 설명하기 어렵게 만든다. 실제로 선조 스스로도 사후에 "이번 패전은 원균의 출전을 독촉한 도원수 때문에 비롯된 것"이라고 언급한 기록이 남아 있다. 다만 가덕도에서 병사 400명을 구하지 않고 물러난 판단, 무방비 상태로 칠천량에 정박한 경계 실패는 현장 지휘관으로서 비판을 피하기 어려운 대목이다.

칠천량 이후, 이순신의 재기

칠천량 궤멸 소식은 조정을 발칵 뒤집었다. 8월 3일 조정은 백의종군 중이던 이순신을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로 불러들였다. 그가 물려받은 것은 배설이 지켜낸 전선 12척과 지칠 대로 지친 수군뿐이었다. 이순신은 한 달여 만에 이 전력을 추스르고 명량 해협의 물살을 이용한 전술로 133척의 일본 함대를 격파했다. 칠천량의 참패가 없었다면 명량의 반전도, 그 극적인 서사도 존재하지 않았을 것이다. 칠천량 이전 임진왜란 전체의 흐름은 임진왜란 전투 순서, 부산진부터 노량까지에서 정리했다.

자주 묻는 질문

Q1. 칠천량해전은 어디서 벌어졌나?

경상도 거제도와 칠천도 사이의 좁은 해협인 칠천량에서 벌어졌다. 진형을 펼치기 어려운 좁은 지형이었다는 점이 조선 수군에게 불리하게 작용했다.

Q2. 칠천량해전에서 살아남은 조선 수군은 얼마나 되나?

경상우수사 배설이 이끈 전선 12척이 남해 방면으로 탈출했다. 이 배들은 이후 전라우수사 김억추의 배 1척과 합류해 명량해전에서 13척으로 싸우게 된다.

Q3. 원균은 왜 부산으로 출전했나?

원균은 애초 부산 정면 돌파 대신 안골포·가덕도를 육군과 함께 협공하는 작전을 제안했지만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이후 조정과 도원수 권율의 거듭된 출전 압박에 시달렸고, 후퇴를 문제 삼아 1597년 7월 11일 곤양에서 곤장까지 맞은 뒤에는 더 물러설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그렇게 재차 나선 항해가 7월 16일 칠천량의 궤멸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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