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상헌과 최명길, 척화와 주화는 무엇이 달랐나

남한산성에 갇혀 있던 1637년 1월 18일, 예조판서 김상헌은 이조판서 최명길이 써 내려간 항복 문서를 손으로 찢으며 통곡했다. 같은 조정, 같은 위기 앞에서 두 사람이 내린 결론은 정반대였다. 김상헌은 죽더라도 의리를 지켜야 한다고 믿었고, 최명길은 나라와 백성을 지키려면 굴욕을 감수해야 한다고 판단했다. 이 대립은 단순한 정치 싸움이 아니라, 국가가 존망의 기로에 섰을 때 무엇을 최우선으로 삼아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이었다.

표로 보는 두 사람

구분김상헌최명길
생몰년1570~16521586~1647
당시 관직예조판서이조판서
노선척화론(주전론)주화론(강화론)
핵심 주장명에 대한 의리, 죽음으로 절의를 지킴실리와 생존, 항복을 통한 나라 보전
상징적 행동항복 국서를 찢고 통곡항복 국서를 직접 작성
이후청에 압송, 심양 옥고청에 압송, 심양 옥고

척화, 죽더라도 의리를 지킨다

김상헌은 남한산성 안에서 척화론을 이끈 중심인물이었다. 그의 논리는 명료했다. 임진왜란 때 조선을 도운 명나라와의 의리를 저버리고 오랑캐라 여기던 청에 무릎을 꿇는 것은 나라의 정체성을 스스로 부정하는 일이라는 것이었다. 싸우다 죽는 한이 있어도 항복해서는 안 된다는 것이 그의 결론이었다. 1637년 1월 18일, 최명길이 청 태종에게 신하를 자처하는 항복 문서 초안을 작성하자 당시 67세이던 김상헌은 이를 직접 찢어버리고 대성통곡했다. 이 장면은 척화파의 입장을 가장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순간으로 남았다.

주화, 살아남아야 지킬 수 있다

최명길의 생각은 달랐다. 당시 조선의 군사력으로는 청군을 물리칠 가능성이 사실상 없다는 것이 그의 현실 인식이었다. 명분을 지키려다 나라가 완전히 무너지면, 그 명분조차 지킬 주체가 사라진다는 논리였다. 그는 조정 대다수가 척화를 외치는 분위기 속에서도 홀로 강화 교섭에 나섰고, 결국 청 태종에게 보낼 항복 문서를 직접 작성했다. 훗날 정적들에게 매국노라는 비난까지 들었지만, 최명길은 왕과 종묘사직, 그리고 백성을 지키는 것이 더 큰 의리라고 믿었다. 그는 국서 작성뿐 아니라 청군 진영을 오가며 협상 실무를 직접 담당했는데, 이 과정에서 조정 안팎의 척화 여론으로부터 거센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6년 뒤, 심양 감옥에서 다시 만나다

두 사람의 이야기는 남한산성에서 끝나지 않았다. 1640년 겨울, 최명길은 명나라와 몰래 내통하며 물자를 지원한 사실이 청에 발각돼 심양으로 끌려갔다. 김상헌 역시 이후에도 계속 척화 상소를 올린 것이 문제가 되어 같은 시기 청에 압송됐다. 두 사람은 심양의 감옥에서 옆방에 갇힌 처지로 다시 마주쳤다. 한때 서로를 역적이라 여기고 반대편에 섰던 이들은 옥중에서 각자의 진심을 확인하고 화해했다. 전하는 이야기에 따르면 김상헌은 최명길에게 "당신을 매국노라 몰아붙인 것을 사과한다. 이제야 당신이 얼마나 나라를 사랑했는지 알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시로 남은 화해

화해의 순간은 시로도 남았다. 김상헌은 "양대의 우정을 다시 찾고, 백 년의 의심을 푼다"는 시를 지었고, 최명길은 "그대의 마음은 돌 같아 끝내 돌리기 어렵지만, 나의 도는 둥근 고리와 같아 상황에 따라 돈다"고 화답했다. 명분을 지킨 사람과 실리를 택한 사람이 각자의 신념을 인정하면서도 서로 다른 길을 걸어온 이유를 이해하게 됐다는 뜻으로 읽힌다. 청 태종 홍타이지가 이 모습을 전해 듣고 "작은 나라 조선에 이런 신하들이 있다는 것이 부럽다"며 감탄했다는 일화도 전하는데, 다만 이는 후대에 각색됐을 가능성도 있어 그대로 사료로 받아들이기보다는 두 사람의 화해가 그만큼 인상적이었다는 정황으로 이해하는 것이 안전하다.

두 사람 다 애국자였을까

이후 역사는 두 사람 모두를 나름의 방식으로 기억했다. 김상헌은 척화의 상징으로 추앙받으며 훗날 노론계 사상의 뿌리 중 하나가 됐고, 최명길은 실리외교의 선구자로 재평가받았다. 어느 한쪽이 온전히 옳았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척화론이 관철됐다면 조선은 더 참혹한 파괴를 겪었을 가능성이 크고, 주화론 덕분에 왕조와 백성이 보존된 것도 사실이다. 다만 최명길의 결단이 없었다면 협상 자체가 지연되며 남한산성의 고립이 더 길어졌을 것이라는 점에서, 그의 현실주의가 실제 위기를 넘기는 데 결정적이었다는 평가도 있다. 흥미로운 것은 두 사람이 원래 정적이 아니었다는 점이다. 같은 서인 계열 관료로 함께 조정에 몸담았던 이들은 병자호란이라는 극단적 위기 앞에서 비로소 갈라섰고, 위기가 걷힌 뒤 옥중에서야 그 간극을 좁혔다.

자주 묻는 질문

Q1. 최명길이 쓴 항복 국서는 실제로 사용됐나?

그렇다. 여러 차례 수정을 거쳤지만 최명길이 주도해 작성한 문서를 바탕으로 조선은 청에 항복 의사를 전달했고, 이는 삼전도 항복으로 이어졌다.

Q2. 김상헌은 이후 어떻게 됐나?

심양에서 오랜 옥고를 치른 뒤 조선으로 돌아와 벼슬에서 물러나 은거했다. 1652년 세상을 떠날 때까지 척화파의 상징적 인물로 남았다.

Q3. 최명길은 매국노라는 비난을 받았나?

그렇다. 항복 문서를 직접 쓴 인물이라는 이유로 생전과 사후 오랫동안 비판의 대상이 됐다. 다만 근래 들어서는 현실적인 위기관리 능력을 보여준 인물로 재평가되는 경향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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