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슬 없이도 왕에게 상소 한 장으로 조정을 뒤흔들 수 있었던 인물, 송시열은 조선 후기 정치를 이해하는 데 빼놓을 수 없는 이름이다. 효종에게 북벌의 이념을 제공했고, 두 차례 예송논쟁의 한쪽 축을 맡았으며, 서인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놓은 장본인이기도 했다. 82세, 사약을 받고 죽는 순간까지 그는 조선 정치의 중심에 있었다.
표로 보는 송시열
| 시기 | 내용 |
|---|---|
| 1607~1689 | 생몰, 호는 우암(尤庵) |
| 1649 | 효종에게 기해봉사 올려 북벌 대의 천명 |
| 1659 | 기해예송, 서인(송시열) 승리 |
| 1674 | 갑인예송, 남인 승리로 서인 실각 |
| 1680년대 | 제자 윤증과 갈등(회니시비), 서인이 노론·소론으로 분당 |
| 1689 | 기사환국으로 제주 유배, 정읍에서 사사 |
북벌의 이념을 세우다
송시열은 1649년 즉위한 효종에게 기해봉사라는 상소를 올려 복수설치(復讐雪恥)와 춘추의리(春秋義理)를 북벌의 대의로 제시했다. 청에 당한 치욕을 씻고 명에 대한 의리를 지켜야 한다는 이 논리는 효종의 군비 강화 정책에 사상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다만 정작 북벌의 구체적 실행 단계에서는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 산림들이 소극적인 태도를 보였다는 평가가 많다. 그에게 북벌은 실현할 군사 계획이라기보다, 조선이 명의 정통을 잇는 문명국이라는 자부심을 지키는 이념적 명분에 가까웠다.
기해예송, 상복을 둘러싼 정쟁
1659년 효종이 세상을 떠나자 그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상복을 몇 년 입어야 하는지를 두고 조정이 둘로 갈라졌다. 송시열을 비롯한 서인은 효종이 둘째 아들이었다는 점을 들어 1년복을 주장했고, 윤휴 등 남인은 왕위를 이었으니 장자에 준하는 3년복을 입어야 한다고 맞섰다. 겉보기에는 상복 기간을 둘러싼 예법 논쟁이었지만, 실제로는 왕권과 신권의 관계를 어떻게 규정할 것인가를 둘러싼 정치 투쟁이었다. 왕이라 해도 예법 앞에서는 사대부와 다를 바 없다는 서인의 논리와, 왕실의 예는 일반 사대부가와 달라야 한다는 남인의 논리가 정면으로 부딪친 셈이다. 이 기해예송에서는 송시열의 서인 측 주장이 받아들여졌다.
갑인예송, 뒤바뀐 승부
15년 뒤인 1674년, 이번에는 효종비 인선왕후가 세상을 떠나면서 같은 자의대비의 상복 문제가 다시 불거졌다. 서인은 이번에도 9개월복을 주장했지만, 남인은 1년복을 주장하며 맞섰다. 이번에는 남인의 주장이 받아들여지면서 서인이 대거 실각했다. 두 차례의 예송논쟁은 예법을 빌려 왕권의 성격과 붕당 간 세력 균형을 다투는 조선 후기 정치의 축소판이었고, 송시열은 그 한복판에 있었다.
회니시비,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다
송시열의 정치적 위상에 또 다른 균열을 낸 것은 제자 윤증과의 갈등이었다. 윤증이 아버지 윤선거의 묘갈명을 부탁했을 때 송시열이 성의 없이 써준 것이 발단이 되어 두 사람의 관계는 점차 틀어졌다. 이 사제 간 갈등은 개인적인 감정 문제를 넘어 서인 내부의 노선 차이와 맞물리며 확대됐고, 결국 서인은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윤증 쪽의 소론으로 갈라졌다. 회니시비라 불리는 이 대립은 이후 노론과 소론이 경종·영조 대까지 이어지는 격렬한 정쟁을 벌이는 출발점이 됐다.
기사환국과 사사
말년의 송시열에게 결정타가 된 것은 1689년 기사환국이었다. 숙종이 후궁 장씨 소생의 아들을 원자로 정하려 하자 송시열은 이에 반대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는 숙종의 격노를 불러왔고, 정국은 순식간에 서인에서 남인으로 넘어갔다. 송시열은 제주도로 유배됐다가 다시 한양으로 압송되던 중 전라도 정읍에서 사약을 받고 세상을 떠났다. 이 정치적 격변으로 인현왕후가 폐위되고 장씨가 왕비에 책봉되는 등 조정은 크게 요동쳤다. 벼슬에서 물러나 재야에 있던 산림의 신분으로 원자 책봉이라는 왕실 최고 사안에 정면으로 반대 의견을 낸 것 자체가, 그가 당대 조선에서 지녔던 정치적 위상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사후의 송시열
사사된 뒤에도 송시열의 영향력은 사라지지 않았다. 그를 따르던 노론 세력은 이후 조선 후기 정치를 오랫동안 주도했고, 그의 학문은 주자학의 정통 계승자로 떠받들어져 문묘에 배향되기까지 했다. 제자들은 충북 괴산 화양동에 명나라 신종과 의종을 제사하는 만동묘를 세워 그의 정신을 기렸다. 하나의 정치·사상적 노선이 한 인물의 죽음 이후에도 이렇게 오랫동안 조선 정치를 규정한 사례는 흔치 않다. 후대 학자들 사이에서 그는 '송자(宋子)'라는 칭호로 불리며 공자·주자에 준하는 예우를 받기도 했는데, 이는 조선에서 성리학자가 오를 수 있었던 권위의 최고 수준을 보여준다.
자주 묻는 질문
Q1. 송시열은 왜 북벌 실행에는 소극적이었나?
명확한 단일 이유가 사료에 남아 있지는 않지만, 학계에서는 청의 국력이 이미 압도적이었던 현실적 한계와, 그에게 북벌이 실제 전쟁 수행보다 사상적 명분의 성격이 강했다는 점을 함께 지적한다.
Q2. 예송논쟁은 왜 두 번이나 벌어졌나?
왕실의 상복 예법을 둘러싼 해석 차이가 효종과 그의 왕비가 잇따라 세상을 떠나면서 두 번 반복해서 불거졌기 때문이다. 각각 왕권의 성격을 규정하는 정치적 의미를 담고 있어 서인과 남인 모두 물러서지 않았다.
Q3. 노론과 소론은 어떻게 나뉘었나?
본래 같은 서인이었지만 송시열과 그의 제자 윤증 사이의 갈등, 이른바 회니시비를 계기로 송시열을 따르는 노론과 윤증 쪽의 소론으로 갈라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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