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를 뒤주 속에서 잃은 왕이 즉위 후 가장 먼저 한 일은 도서관을 짓는 것이었다. 정조가 1776년 세운 규장각이다. 표면적으로는 역대 왕의 글과 책을 보관하는 서고였지만, 정조는 이 공간을 신분과 당파를 넘어선 인재를 길러내는 정치 기구로 키워냈다. 영조의 탕평책을 물려받은 정조가 택한 다음 수는, 아예 새로운 방식으로 사람을 뽑는 것이었다.
표로 보는 정조의 인재 등용
| 시기 | 내용 |
|---|---|
| 1776 | 정조 즉위, 창덕궁 후원에 규장각 설립 |
| 1777 | 서얼허통절목 발표 |
| 1779 | 이덕무·유득공·박제가·서이수, 초대 검서관 발탁 |
| 1781 | 초계문신제 시행, 규장각 기능 본격 정비 |
| 1781~1800 | 초계문신 총 10회 선발, 138명 배출 |
서고에서 정치기구로
정조는 즉위한 1776년 3월 창덕궁 후원에 어제존각을 세웠다. 처음에는 선왕 영조의 글을 봉안하는 어제각이라는 이름이었으나 곧 규장각으로 이름을 바꿨다. 정조는 학문을 진흥시켜 의리를 밝히는 것이 흐트러진 정치를 바로잡는 길이라 믿었고, 이 신념이 규장각 설립으로 이어졌다. 동시에 즉위 초부터 외척과 환관의 발호를 억누를 혁신 정치의 거점이 필요했던 그에게, 규장각은 명분과 실리를 모두 갖춘 기구였다.
서얼에게 열린 문, 네 명의 검서관
정조는 1777년 서얼허통절목을 발표해 서얼 출신도 관직에 나갈 길을 넓혔다. 이 조치의 실질적인 결실이 1779년 규장각 검서관 임명이었다. 이덕무, 유득공, 박제가, 서이수 네 사람이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됐는데, 모두 당대 손꼽히는 서얼 출신 학자들이었다. 검서관은 품계로는 7품 이하의 실무 하급관료에 불과했지만, 이들은 정조의 각별한 신임을 받았다. 박제가는 견줄 자가 없는 선비라는 뜻의 '무쌍사'로 불릴 정도였다. 신분 때문에 능력을 펼치지 못하던 인재들에게 규장각은 사실상 유일한 통로였다. 이덕무와 유득공, 박제가는 이후 청나라 연행 사절에 동행하며 견문을 넓혔고, 이때 접한 청의 학문과 기술은 훗날 북학 사상으로 이어지는 밑거름이 됐다.
초계문신제, 젊은 관료를 다시 가르치다
1781년 정조는 초계문신제를 시행했다. 37세 이하의 당하관 중에서 유망한 인재를 뽑아 본래 맡은 업무를 면제하고 학문 연구에만 전념하게 하는 제도였다. 한 달에 두 차례 구술시험, 한 차례 필답시험으로 성과를 평가했는데, 정조가 직접 강론에 참여하고 시험을 채점하는 경우도 잦았다. 1800년 정조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모두 열 차례에 걸쳐 138명이 이 제도를 거쳤다. 젊은 관료들이 기존 붕당의 인맥이나 관행에서 벗어나 왕과 직접 학문적, 인간적 유대를 맺도록 설계된 제도였다.
규장각의 숨은 목적, 친위 세력 양성
규장각의 순수한 학술 기능 이면에는 정치적 계산이 뚜렷했다. 정조는 규장각을 자신의 정치적 친위 세력을 길러내는 기구로 활용했다. 1781년 규장각 기능을 본격적으로 정비한 뒤, 전·현직 각신들과 함께 유학 경전을 강론하고 정치 혁신을 위한 보좌를 당부하며 상을 내리는 자리를 자주 마련했다. 이는 외척 세력으로 인해 느슨해진 관료 기강을 근신, 즉 왕에게 가까운 신하들을 통해 다잡으려는 목적에서 나온 조치였다. 붕당의 추천이 아니라 왕이 직접 발탁하고 가르친 인재들이 조정 요직에 배치되면서, 정조의 왕권은 자연스럽게 강화됐다.
영조와는 다른 길, 준론탕평
정조의 인재 운용 방식은 아버지 세대의 탕평과 결이 달랐다. 영조가 노론과 소론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완론탕평을 폈다면, 정조는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고 그 위에서 인재를 기용하는 준론탕평에 가까웠다. 규장각과 초계문신제는 이런 정조식 탕평을 뒷받침하는 제도적 장치였다. 붕당의 명분보다 실력과 왕에 대한 충성을 우선하는 인재를 키워, 기존 정치 지형 자체를 서서히 바꾸려 한 것이다.
규장각이 남긴 것
정치적 목적과 별개로 규장각은 조선 후기 학술과 출판 문화에도 큰 흔적을 남겼다. 각종 서적 편찬 사업의 중심 기구로 기능하며 방대한 국가 기록물과 도서를 정리했고, 검서관들을 통해 실학과 북학 사상이 국정에 스며드는 통로가 되기도 했다. 규장각 출신 인재들이 정조 사후에도 조선 후기 학계와 관계에 폭넓은 영향을 남겼다는 점에서, 이 기구는 단순한 서고를 넘어 한 시대의 지적 인프라였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정조 사후 세도정치기에 접어들며 규장각의 정치적 위상은 크게 쇠퇴했지만, 방대한 소장 자료와 편찬 전통은 오늘날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으로 이어져 여전히 조선 후기사 연구의 핵심 자료로 활용되고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검서관은 정식 관료였나?
그렇다. 다만 품계는 7품 이하로 높지 않았다. 신분상 정규 문과 급제 후 고위직에 오르기 어려웠던 서얼 출신에게는, 실력을 인정받을 수 있는 사실상 최고의 통로였다.
Q2. 초계문신제와 과거 시험은 어떻게 다른가?
과거는 관직에 나가는 관문이었다면, 초계문신제는 이미 관직에 있는 젊은 인재를 다시 선발해 왕이 직접 재교육하는 제도였다. 업무를 면제하고 학문에 전념하게 했다는 점에서 오늘날의 엘리트 재교육 프로그램에 가깝다.
Q3. 정조의 준론탕평은 완론탕평보다 나은 방식이었나?
어느 쪽이 절대적으로 우월했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완론탕평은 갈등을 완화하는 데, 준론탕평은 옳고 그름을 분명히 하며 개혁 동력을 만드는 데 강점이 있었다. 두 방식 모두 붕당 정치라는 근본 구조를 완전히 없애지는 못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