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제가와 북학의, 조선은 왜 청을 배우려 했나

양반이 장사를 하면 손가락질받던 시대에, 박제가는 청나라 상인의 활기를 보고 정반대의 결론을 내렸다. 물건을 쓰지 않는 것이 검소가 아니라 나라를 가난하게 만드는 병폐라는 것이었다. 서얼로 태어나 정조의 눈에 들어 규장각 검서관이 된 그는, 단 한 번의 청나라 여행을 3개월 만에 개혁서 《북학의》로 응축해냈다.

표로 보는 박제가와 북학의

시기내용
1750~1805박제가 생몰
1778첫 연행, 귀국 후 3개월 만에 《북학의》 저술
1779규장각 초대 검서관 발탁
1798정조에게 《진소본북학의》 진상
1801흉서사건 연루, 함경도 종성 유배
1804유배에서 풀려남
1805사망

서얼로 태어나 청나라를 보다

박제가는 서얼 신분으로 태어나 정식 관직에 나가는 데 제약이 컸지만, 1779년 규장각 초대 검서관으로 발탁되며 학문적 역량을 펼칠 기회를 얻었다. 그 전해인 1778년, 그는 정사 채제공과 부사 서호수를 수행해 첫 청나라 연행길에 올랐다. 북경에 머무는 동안 이조원, 반정균 등 청나라 학자들과 직접 교류하며 견문을 넓혔다. 조선에서는 변방으로 취급받던 상업과 기술이 청나라에서는 국가를 지탱하는 힘으로 작동하는 모습을 그는 눈으로 확인했다.

3개월 만에 쓴 개혁서

귀국길, 임진강변의 통진에 머물던 박제가는 연행에서 보고 들은 내용을 단 3개월 만에 《북학의》라는 책으로 정리했다. 이 책은 정조에게 국력을 키우려면 교역로를 열고 청의 문물과 제도를 받아들이며, 생산 기술과 도구를 개선하고 상업을 국가 차원에서 장려해야 한다고 건의하는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제목의 '북학'은 북쪽, 즉 청나라의 학문과 기술을 배운다는 뜻이다.

내편과 외편, 기반시설에서 농업까지

《북학의》는 내편과 외편으로 구성된다. 내편에서는 수레·선박·성곽·벽돌·기와·주택·도로·교량 같은 국가 기반시설을 정비해 사람과 물자의 유통을 원활히 해야 한다고 주장하며, 시장과 화폐, 은, 철 등 상업 전반의 중요성도 함께 논했다. 외편에서는 밭과 거름, 양잠, 농기구, 수차 등 농업 기술을 향상시킬 구체적인 방안을 다뤘다. 조선이 청나라에 비해 뒤처진 이유를 기술과 유통, 두 측면에서 동시에 짚은 셈이다.

"쓰지 않으면 말라버리는 우물"

박제가의 사상에서 가장 파격적인 대목은 소비를 바라보는 관점이었다. 그는 "재물은 우물과 같다. 퍼내면 다시 가득 차지만, 길어 쓰지 않으면 말라버린다"고 비유했다. 조선 사회가 존재하지도 않는 물건을 아예 쓰지 않는 것을 검소함으로 미화하고, 필요한 물건을 쓰는 것을 사치로 매도하는 현실을 그는 개탄했다. 비단옷을 입어야 비단을 짜는 사람이 먹고살 수 있듯, 다양한 물건을 소비해야 그와 관련된 생산과 기술이 함께 발전한다는 논리였다. 절약만이 미덕이라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한 주장이었다.

신분을 넘어선 상업관

박제가는 신분제에 대해서도 날카로운 비판을 남겼다. 그는 중국에서는 가난한 사람이 장사꾼이 돼도 그 사람의 풍류와 명예가 그대로 인정받지만, 조선에서는 그런 신분으로 시장에 드나들면 모두가 비웃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양반이 상업을 천시하는 문화가 결국 나라 전체의 경제력을 갉아먹는다는 것이 그의 진단이었다. 서얼로서 신분의 벽을 몸소 겪은 그였기에, 상업을 억누르는 신분 관념에 대한 비판은 더욱 날이 서 있었다.

정조에게 바친 진소본북학의

1798년 정조가 농서를 구하는 윤음을 내리자, 박제가는 《북학의》를 요약하고 농업 관련 내용을 대폭 보강한 《진소본북학의》를 지어 올렸다. 곡식과 볍씨, 논, 수리, 모내기, 감자 재배법 등 실용적인 농업 기술 항목이 추가된 이 책은, 그의 개혁론이 단순한 이상론에 그치지 않고 실제 정책에 반영되기를 바란 실천적 시도였다.

흉서사건과 쓸쓸한 말년

박제가의 삶은 정조 생전까지는 비교적 순탄했지만, 정조가 세상을 떠난 뒤 급격히 어그러졌다. 1801년 네 번째 연행에서 돌아온 직후, 사돈이었던 윤가기가 주모한 흉서사건에 연루돼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다. 1804년 유배에서 풀려났지만 이듬해인 1805년, 56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정조라는 강력한 후원자를 잃은 뒤 개혁적인 학자가 정치적 사건에 휘말려 몰락하는 전형적인 경로를 그도 피하지 못한 셈이다.

북학파가 남긴 것

박제가를 비롯한 북학파 학자들의 주장은 당대에는 이단에 가까운 취급을 받았지만, 상업과 기술을 국가 발전의 핵심으로 본 그들의 시각은 훗날 개화사상으로 이어지는 사상적 씨앗이 됐다. 청나라를 오랑캐로만 여기던 시절, 그 청나라조차 배울 점이 있다고 당당히 말한 것 자체가 당시로서는 급진적인 태도였다. 실현되지 못한 개혁론이었지만, 조선 후기 실학이 걸어간 방향을 가장 뚜렷하게 보여주는 저작으로 《북학의》는 지금도 읽힌다.

자주 묻는 질문

Q1. 북학이라는 말은 무슨 뜻인가?

북쪽에 있는 나라, 즉 청나라의 학문과 기술을 배운다는 뜻이다. 당시 조선은 청을 오랑캐로 여기는 정서가 강했는데, 박제가는 이런 통념과 달리 청의 실용적 기술과 제도를 적극적으로 배워야 한다고 주장했다.

Q2. 박제가는 정조에게 직접 개혁안을 올렸나?

그렇다. 1798년 농서를 구하는 정조의 윤음에 응해 《진소본북학의》를 지어 올렸다. 다만 이 건의가 실제 국가 정책으로 폭넓게 반영되지는 못했다.

Q3. 박제가는 왜 유배됐나?

본인이 직접 죄를 지은 것은 아니었다. 1801년 사돈이었던 윤가기가 주모한 흉서사건에 연루되면서 함경도 종성으로 유배됐고, 3년 뒤 풀려났지만 이듬해 세상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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