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9월 1일,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의 최대 근거지인 부산포를 기습했다. 상대는 사상 최대 규모인 470여 척. 왜 승산이 낮아 보이는 본거지를 직접 공격했을까. 답은 '보급로 차단'에 있었다.
한산도대첩 이후, 부산포가 남았다
7월 한산도대첩과 안골포해전으로 남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일본군의 최종 근거지인 부산포를 그대로 두면 전쟁이 장기화된다고 판단했다. 부산포는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병참기지였고, 이곳이 살아있는 한 일본군은 언제든 재보급이 가능했다.
470여 척, 사상 최대 규모
부산포에는 안택선과 세키부네를 합쳐 470여 척이 정박해 있었다. 이순신은 전라좌수사·경상우수사·전라우수사 함대를 통합한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등 총 166척을 이끌고 출정했다. 수적으로는 열세였지만, 정박 중인 함대를 기동전이 아닌 화포전으로 제압한다는 전략이었다.
정운 장군의 전사
전투는 치열했다. 녹도만호 정운은 선봉에서 적진 깊숙이 돌진하다 이마에 조총탄을 맞고 전사했다. 이순신은 난중일기에 정운의 죽음을 애통해하며 기록했고, 이후 그를 기리는 사당(정운공 사당)이 세워졌다. 이 전투는 조선 수군에게도 결코 무혈 승리가 아니었다.
| 구분 | 내용 |
|---|---|
| 일시 | 1592년 음력 9월 1일 |
| 조선 수군 | 판옥선 74척, 협선 92척 (166척) |
| 일본 수군 | 안택선·세키부네 등 470여 척(정박) |
| 주요 인물 | 이순신, 정운(전사), 이억기, 원균 |
| 결과 | 일본 함선 100여 척 격파, 부산포 기능 마비 |
정박 함대를 어떻게 격파했나
일본군은 배를 버리고 육상 진지로 올라가 조총으로 응사했다. 조선 함대는 상륙전을 피하고 장사진 대형으로 포구를 오가며 함포 사격만 반복했다. 근접 백병전을 피한 이 판단이 병력 손실을 최소화한 핵심이었다. 이충무공전서에는 이날 하루 동안 벌어진 교전 상황이 비교적 상세히 남아 있다.
전투 이후, 이순신의 선택
부산포 공격 후 이순신은 무리한 장기 점령 대신 함대를 철수시켰다. 적의 본거지를 완전히 소탕하기보다 전력을 보존하며 남해 제해권을 유지하는 쪽을 택한 것이다. 이 결정으로 조선 수군은 이후 정유재란 시기까지 함대 전력을 지킬 수 있었다.
자주 묻는 질문
- Q. 부산포해전은 왜 임진왜란 최대 해전으로 불리나?
A. 동원된 일본 함선이 470여 척으로, 임진왜란 해전 중 단일 전투 규모가 가장 컸기 때문이다. - Q. 정운 장군은 어떤 인물인가?
A. 녹도만호로, 부산포해전에서 선봉에 서서 싸우다 조총탄에 맞아 전사한 조선 수군 장수다. - Q. 부산포해전에서 조선군이 이겼다고 볼 수 있나?
A. 함선 100여 척을 격파하고 부산포 기능을 마비시켰다는 점에서 전략적 승리로 평가되지만, 완전 점령은 아니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