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함대는 판옥선과 거북선 3척만으로 일본 수군 66척 중 59척을 격파했다. 승패를 가른 것은 병력 수가 아니라 견내량 유인과 학익진이라는 전술이었다. 이 글은 그 전술이 왜, 어떻게 통했는지를 답한다.
견내량이 문제였다
당시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3척(전투선 36척, 보조선 다수)을 이끌고 견내량 해협에 정박해 있었다. 견내량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처럼 큰 배가 기동하기 어려운 지형이다. 이순신은 이곳에서 정면 승부를 벌이면 아군 피해가 커진다고 판단했다.
판옥선 5~6척을 미끼로 던지다
이순신은 판옥선 5~6척을 견내량으로 보내 일본군을 자극했다. 와키자카 함대가 추격에 나서자 조선 함대는 한산도와 거제도 사이의 넓은 바다로 후퇴했다. 좁은 해협에서 벗어난 순간, 전투의 무대는 완전히 바뀌었다.
학익진, 학이 날개를 펴듯
넓은 바다에 도달하자 이순신은 신호를 내려 함대를 학이 날개를 펼친 모양(학익진)으로 전개시켰다. 좌우로 벌어진 판옥선들이 일본 함대를 반원형으로 감싸며 동시에 함포를 발사했다. 거북선 3척은 선두에서 적진 한가운데로 돌진해 대오를 흩뜨리는 역할을 맡았다.
| 구분 | 조선 수군 | 일본 수군(와키자카) |
|---|---|---|
| 주력 함선 | 판옥선, 거북선 3척 | 안택선·세키부네 등 73척 |
| 전술 | 견내량 유인 → 학익진 포위 | 추격 → 근접전 시도 |
| 결과 | 피해 경미 | 59~66척 격침·나포 |
화력 차이가 결정타였다
일본군은 조총과 백병전에 강했지만, 조선 판옥선에는 천자총통·지자총통 등 함포가 실려 있었다. 근접전 대신 원거리 포격으로 승부를 낸 것이 피해를 최소화한 핵심이다. 이 기록은 이순신이 직접 쓴 난중일기와 이후 편찬된 이충무공전서에 상세히 남아 있다.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꾼 전투
한산도대첩은 진주대첩, 행주대첩과 함께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꼽힌다. 이 승리로 일본은 남해 제해권을 사실상 상실했고, 전라도 곡창지대를 통한 보급로가 끊겼다. 선조실록에도 이 전과가 조정에 보고된 기록이 남아 있다.
자주 묻는 질문
- Q. 한산도대첩은 정확히 언제 일어났나?
A. 1592년 음력 7월 8일(양력 8월 14일경)이다. - Q. 거북선은 몇 척이 참전했나?
A. 이 전투에는 거북선 3척이 투입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 Q. 학익진은 이순신이 만든 전술인가?
A. 학익진 자체는 오래된 진법이지만, 이를 해전에 대규모로 적용해 성공시킨 것은 이순신의 창의적 응용으로 평가된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