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26년, 동북아시아의 강국으로 군림하던 발해는 거란(요나라)의 침공으로 역사 속에서 사라졌다. 그러나 발해의 멸망은 단순한 전쟁의 결과가 아니었다. 내부의 정치적 불안, 경제적 격차, 외교 관계의 약화가 복합적으로 작용하면서 이미 균열이 깊어지고 있었다. 발해의 멸망은 동북아 세력 구조를 완전히 바꾼 전환점이었으며, 이후 고려와 요, 일본의 관계가 새롭게 재편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 글에서는 발해 멸망의 내적 요인과 외적 요인을 구분해 분석하고, 그 결과가 남긴 역사적 의미를 살펴본다.
1. 내부 요인: 정치 불안과 권력 집중
발해의 정치 구조는 왕권 중심 체제였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귀족 세력이 지나치게 강화되었다. 중앙의 권력이 일부 가문에 집중되면서 지방의 통제력이 약화되었고, 국왕 교체 때마다 내란이 발생했다. 특히 마지막 왕 대인선 시기에는 귀족 간 갈등이 극심해져 행정체계가 마비되었다. 또한 세습 중심의 지배 구조는 새로운 인재의 등장을 막았고, 변화하는 국제 정세에 대응할 정치적 역동성을 잃게 되었다.
2. 경제 기반의 약화
8세기 후반 이후 발해의 경제는 점차 쇠퇴했다. 한때 번성했던 해상 교역은 신라 및 일본과의 관계 악화로 인해 위축되었고, 요하 지역에서 당나라 세력이 약화되면서 육상 교역로도 단절되었다. 또한 연해주의 기후 변화로 농업 생산량이 줄어들었고, 세금 수입이 감소하면서 중앙 재정이 불안정해졌다. 발해는 외형상 강국이었지만 내부적으로는 이미 경제적 피로 상태에 빠져 있었다.
3. 외부 요인: 요(거란)의 부상과 국제 질서의 재편
발해 멸망의 직접적 원인은 거란의 침공이었다. 거란은 유목민 출신이었으나, 10세기 초 야율아보기가 강력한 군사력과 통치 체제를 구축하며 세력을 확장했다. 당시 거란은 발해의 북방 방어선을 빠르게 돌파했고, 발해의 수도 상경용천부를 함락시켰다. 그러나 주목할 점은 발해가 외교적으로 고립되어 있었다는 것이다. 신라와 일본은 이미 발해와의 교류를 끊었고, 당나라 역시 내부 혼란으로 도움을 줄 여력이 없었다. 결국 발해는 ‘고립된 강국’으로서 무너질 수밖에 없었다.
| 요인 구분 | 세부 내용 | 영향 |
|---|---|---|
| 정치적 요인 | 귀족 중심 권력, 왕권 약화 | 내부 분열 가속화 |
| 경제적 요인 | 무역 감소, 농업 쇠퇴 | 재정 불안정 |
| 외교적 요인 | 신라·당나라와의 단절 | 국제 고립 심화 |
| 군사적 요인 | 거란의 침공 | 상경 함락 및 멸망 |
4. 발해 멸망 이후의 동북아 정세
발해의 멸망은 동북아 세력 균형을 근본적으로 흔들었다. 거란은 요나라를 세워 만주와 화북을 장악했고, 신라 역시 이후 고려로 교체되며 한반도 통일을 향해 나아갔다. 한편, 발해 유민 일부는 고려로 귀속되어 문화와 기술 전파의 매개가 되었고, 이는 고려의 초기 제도 형성에 큰 영향을 주었다. 또한 발해 유민의 이동은 만주 지역의 인구 구조와 문화적 구성을 바꾸는 결과를 낳았다.
5. 역사적 의미
발해의 멸망은 단순히 한 국가의 소멸이 아니라, 고대 동북아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중세 질서가 형성되는 전환점이었다. 정치적으로는 중앙집권 국가의 한계를 보여주었고, 경제적으로는 무역 중심 구조의 취약성을 드러냈다. 그러나 발해가 남긴 제도와 문화는 이후 고려의 행정, 외교, 문화 속에 계승되었다. 발해의 역사는 사라진 왕조의 이야기가 아니라, 한민족과 동북아 세계가 교차한 흔적의 기록이다.
결론
발해의 멸망은 외세의 침략보다 내부의 분열과 외교적 고립이 더 큰 원인이었다. 강국일수록 내부 결속과 국제 연대의 중요성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교훈을 남긴다. 비록 발해는 사라졌지만, 그 역사적 흔적은 고려와 조선, 그리고 오늘날 한반도의 역사적 정체성 속에서 여전히 살아 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