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종 시대 정쟁, 게장 한 접시가 남긴 의혹

왕에게 아직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신하들이 먼저 나서서 후계자의 대리청정을 요구했다. 1721년 조선 조정에서 벌어진 일이다. 경종의 왕세제였던 연잉군, 훗날의 영조를 둘러싸고 노론과 소론이 정면충돌했고, 그 결과 노론의 핵심 인사들이 처형되는 신임사화로 이어졌다. 3년 뒤 경종이 갑작스럽게 세상을 떠나면서 이 대립은 영조의 재위 내내 발목을 잡는 독살설로 남았다.

표로 보는 경종 시대 정쟁

시기내용
1720숙종 승하, 경종 즉위
1721.8노론 주도로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
1721.10노론, 왕세제 대리청정 건의 → 소론 반발로 철회
1721.12(신축)김일경 상소로 노론 축출(신축옥사)
1722.3(임인)목호룡 고변, 노론4대신 등 처형(임인옥사)
1724.8경종 급서, 독살설 제기

후사 없는 왕과 왕세제 책봉

1720년 숙종이 승하하고 그 아들 경종이 왕위를 이었다. 문제는 경종에게 자녀가 없었다는 점이었다. 즉위 이듬해인 1721년 8월, 정국을 주도하던 노론은 경종의 이복동생 연잉군을 왕세제로 책봉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표면적으로는 왕실의 후사를 안정시키기 위한 조치였지만, 소론 입장에서는 아직 젊은 왕이 건재한 상황에서 후계 구도를 서두르는 것 자체가 석연치 않은 움직임이었다.

대리청정 파동

왕세제 책봉에 성공한 노론은 두 달 뒤인 1721년 10월 한 걸음 더 나아갔다. 하급 관원 조성복의 상소를 시작으로, 왕세제 연잉군에게 국정을 대신 처리하게 하는 대리청정을 시행하자고 건의한 것이다. 이는 사실상 경종의 통치권을 왕세제에게 넘기라는 요구나 다름없었다. 소론 측 좌참찬 최석항이 강하게 만류하면서 경종은 대리청정 명을 거둬들였지만, 이 사건으로 노론이 경종의 왕권을 위협하려 한다는 의심이 소론 사이에 널리 퍼졌다. 하급 관원의 상소로 시작해 노론 대신들이 뒤를 받치는 방식은 이후 신축옥사에서도 유사하게 반복되며 노론의 조직적 개입이라는 인상을 짙게 남겼다.

신축옥사, 노론이 축출되다

대리청정 논란이 가라앉지 않던 1721년 12월, 소론의 김일경이 노론을 겨냥한 상소를 올렸다. 이를 계기로 노론의 핵심 세력이 대거 조정에서 축출되고 소론이 정권을 장악했다. 신축년에 일어났다고 해서 신축옥사라 불리는 이 사건은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진 서인의 오랜 대립이 만든 신임사화의 첫 단계였다.

목호룡의 고변과 임인옥사

이듬해인 1722년 3월, 남인 출신 목호룡이 노론 측이 경종을 시해하려는 음모를 꾸몄다고 조정에 고변했다. 그가 주장한 이른바 삼급수설은 칼로 살해하는 대급수, 독약으로 살해하는 소급수, 모함으로 폐출시키는 평지수 세 가지 방법을 노론이 계획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고변으로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우의정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등 이른바 노론 4대신이 사사되거나 처형됐다. 정법으로 처리된 인원이 20여 명, 매를 맞아 죽은 이가 30여 명에 이르렀고 유배된 사람만 100명이 넘었다. 신축년과 임인년에 걸쳐 벌어진 이 두 사건을 합쳐 신임사화라 부른다. 이 시기 노론에서 소론으로 넘어간 정권은 훗날 영조가 즉위한 뒤 다시 뒤집히는데, 두 붕당의 이런 부침은 앞서 숙종 대 세 차례 환국에서 이미 반복됐던 패턴이기도 했다.

경종의 죽음과 게장 논란

1724년 8월, 경종은 왕세제궁에서 보내온 게장으로 수라를 든 뒤 곧이어 생감을 먹었다. 그날 밤부터 증세가 급격히 나빠져 닷새 만에 세상을 떠났다. 소론 쪽에서는 이를 두고 연잉군, 즉 왕세제가 형을 독살했다는 의혹을 강하게 제기했다. "갑진년부터는 게장을 먹지 않는다"는 말이 유행할 정도로 이 의혹은 널리 퍼졌다. 다만 오늘날 역사학계에서는 경종이 원래 병약했던 데다 상한 게장으로 인한 식중독이 직접적인 사인이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보는 시각이 우세하다.

영조의 즉위와 오래 남은 그림자

경종의 뒤를 이어 왕세제 연잉군이 영조로 즉위했다. 그러나 독살설은 그의 재위 내내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했다. 이인좌의 난, 나주괘서사건 등 영조 시대에 벌어진 여러 반란과 소요 사건에서 경종 독살설이 반복해서 소환됐다. 진위와 무관하게 이 의혹 자체가 노론과 소론의 대립 구도를 재위 내내 지속시키는 불씨가 됐고, 영조가 훗날 탕평책을 강하게 추진한 배경에도 이 정통성 논란을 잠재우려는 목적이 있었다는 해석이 있다. 즉위 초 영조가 신임사화로 희생된 노론 4대신의 신원을 서두르고 소론 강경파를 견제한 것도, 결국 자신을 둘러싼 의혹을 정치적으로 매듭짓기 위한 조치였다는 평가를 받는다.

자주 묻는 질문

Q1. 신임사화의 신축·임인은 무엇을 뜻하나?

육십갑자로 표기한 사건 발생 연도다. 1721년이 신축년, 1722년이 임인년이어서 두 해에 걸쳐 일어난 사건을 합쳐 신임사화라 부른다.

Q2. 노론4대신은 누구인가?

영의정 김창집, 좌의정 이건명, 우의정 이이명, 판중추부사 조태채 네 사람이다. 왕세제 책봉과 대리청정을 주도했다가 임인옥사로 모두 처형되거나 사사됐다.

Q3. 경종 독살설은 사실로 확인됐나?

확정된 것은 아니다. 당대 소론 세력이 강하게 제기했지만, 오늘날 학계에서는 경종의 지병과 상한 음식으로 인한 식중독을 유력한 사인으로 보는 시각이 더 우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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