즉위하자마자 자신을 왕으로 인정하지 않는 반란군과 맞서야 했던 왕이 있다. 영조다. 형 경종의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을 등에 업고 일어난 반란을 진압한 그는, 이후 재위 내내 노론과 소론이라는 두 축의 균형을 맞추는 탕평책에 매달렸다. 그러나 이 정치 기술은 붕당의 뿌리를 뽑지 못했고, 결국 자신의 아들 사도세자를 죽음으로 몰아넣는 비극으로 한계를 드러냈다.
표로 보는 영조의 탕평책
| 시기 | 내용 |
|---|---|
| 1724 | 영조 즉위 |
| 1728 | 이인좌의 난(무신란) 발생, 진압 |
| 1728 이후 | 기유대처분, 완론탕평 본격화 |
| 1741 | 붕당 근거지인 서원·사우 신설 금지, 향현사·영당 170여 개 훼철 |
| 1742 | 성균관에 탕평비 건립 |
| 1750 | 균역법 시행 |
| 1762 | 임오화변, 사도세자 사망 |
즉위 초 반란, 이인좌의 난
1724년 즉위한 영조는 곧바로 정통성 시비에 시달렸다. 경종의 갑작스러운 죽음을 둘러싼 독살설이 가라앉지 않은 상태였고, 1728년에는 이를 명분 삼은 소론·남인 급진 세력이 전국 규모의 반란을 일으켰다. 이인좌의 난, 다른 이름으로 무신란이라 불리는 이 사건이다. 반란은 진압됐지만, 왕권의 정당성을 노골적으로 부정하는 무력 도전을 겪은 영조에게는 붕당 대립 자체를 근본적으로 다스려야 한다는 위기의식이 강하게 자리 잡았다.
기유대처분과 완론탕평
이인좌의 난을 수습한 영조는 붕당 타파를 전면에 내건 기유대처분을 내리며 탕평 정치를 본격화했다. 그의 방식은 노론과 소론의 강경파를 조정에서 물러나게 하고, 대신 양쪽의 온건파를 고루 등용하는 것이었다. 이런 온건파를 완론(緩論)이라 불렀고, 이 시기의 탕평을 완론탕평이라 부른다. 어느 한쪽을 완전히 배제하지 않으면서도 강경 대립의 축을 무디게 만드는 방식이었다.
탕평비, 성균관에 새긴 경고
1742년 영조는 자신이 직접 쓴 글귀를 새긴 비석을 성균관 앞에 세웠다. 이것이 탕평비다. 비석에는 "두루 사귀되 편을 가르지 않는 것이 군자의 공적인 마음이요, 편을 갈라 두루 사귀지 않는 것이 소인의 사사로운 마음이다(周而不比 君子之公心, 比而不周 小人之私意)"라는 《논어》의 구절이 새겨졌다. 장차 조정에 나갈 유생들에게 붕당에 치우치지 말라는 경고를 성균관이라는 상징적인 공간에 새겨 넣은 것이다.
서원 정리, 붕당의 뿌리를 캐다
탕평책을 실질적으로 뒷받침하기 위해 영조는 붕당의 근거지 역할을 하던 서원과 사우도 손봤다. 1741년에는 새로운 서원과 사우를 함부로 세우는 것을 금지했고, 숙종 40년 이후 새로 지어진 향현사와 영당 170여 개를 헐어냈다. 서원은 학문 연구 기관이면서 동시에 붕당의 지방 조직 역할을 겸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를 정리하는 것은 붕당 간 세력 다툼의 물리적 기반을 약화시키려는 조치였다. 훗날 정조와 흥선대원군 시기에도 비슷한 성격의 서원 정리가 반복된다는 점에서, 서원 통제는 조선 후기 왕권이 즐겨 쓴 붕당 견제 수단이었다고 볼 수 있다.
균역법, 민생과 탕평을 함께
1750년 시행된 균역법은 탕평책과 직접 연결되지는 않지만, 왕권 강화와 백성의 부담 완화를 동시에 노린 영조 정치의 또 다른 축이었다. 군포 부담을 2필에서 1필로 줄여 백성의 짐을 덜어주는 개혁이었다. 다만 줄어든 세수를 메우기 위한 보완책들이 완전하지 않아 근본적인 양역 제도의 문제까지 해결하지는 못했다는 한계도 함께 지적된다.
탕평책의 한계와 임오화변
탕평책은 어디까지나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붕당 간 다툼을 억누른 정치 기술이었지, 붕당 정치의 근본적인 구조를 바꾼 개혁은 아니었다. 그 한계는 1762년 가장 비극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노론 배후가 있었다고 알려진 나경언의 고변을 계기로, 영조는 아들인 세자를 뒤주에 가둬 죽게 했다. 이른바 임오화변이다. 노론과 소론의 정쟁이 왕과 세자라는 국가 권력의 정점과 차기 정점 사이의 갈등으로까지 번진 결과였다. 탕평책이 붕당의 표면적인 충돌은 억눌렀지만, 그 이면의 뿌리 깊은 대립까지 해소하지는 못했음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정조로 이어진 탕평
비극적인 사건에도 불구하고 영조의 탕평 정치 자체는 이어졌다. 사도세자의 아들인 정조는 즉위 후 영조의 탕평 정책을 계승해 발전시켰다. 다만 정조의 탕평은 온건파를 두루 기용하던 영조의 완론탕평과 달리, 옳고 그름을 분명히 가리는 준론탕평에 가까웠다는 평가를 받는다. 두 왕에 걸친 탕평 정치는 조선 후기 왕권과 붕당 사이의 힘겨루기를 상징하는 오랜 실험이었다. 정조가 규장각을 통해 젊은 인재를 직접 길러내며 붕당의 인사 관행에서 벗어나려 한 것도, 아버지 영조의 완론탕평이 남긴 한계를 보완하려는 시도로 볼 수 있다.
자주 묻는 질문
Q1. 탕평책은 붕당을 완전히 없앴나?
아니다. 강경파를 배제하고 온건파를 고루 등용해 대립을 완화했을 뿐, 노론과 소론이라는 붕당 구조 자체는 계속 유지됐다. 임오화변에서 보듯 갈등의 뿌리는 완전히 해소되지 않았다.
Q2. 탕평비는 지금도 남아 있나?
그렇다. 서울 성균관 대성전 입구 부근에 세워져 있으며, 영조가 직접 쓴 글귀가 새겨진 비석으로 지금도 확인할 수 있다.
Q3. 임오화변과 탕평책은 어떤 관계가 있나?
탕평책이 붕당 간 표면적 대립을 억누르는 데는 성과를 냈지만, 노론 배후가 지목된 나경언 고변 사건이 세자의 죽음으로까지 이어지면서 탕평책만으로는 뿌리 깊은 당쟁을 근본적으로 해소할 수 없었다는 한계를 드러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