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맞붙은 동군과 서군은 병력 규모만 보면 서군이 오히려 우세했다. 그런데 전투는 반나절 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승리로 끝났다. 결정적 이유는 서군 내부에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이다. 이 글은 그 배신이 어떻게 일어났고, 왜 전투 전체를 뒤집었는지를 따라간다.
동군과 서군은 왜 갈라섰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던 다섯 다이로(대로)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다이로 중 가장 강력한 세력을 가진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점차 독자 행보를 넓혔고, 이에 반발한 이시다 미쓰나리가 여러 다이묘를 규합해 서군을 결성했다. 표면적으로는 도요토미 가문 수호를 내세웠지만, 실질적으로는 도쿠가와의 권력 확장을 막으려는 세력 다툼이었다.
병력은 어느 쪽이 많았나
세키가하라 전투 당일 동원된 병력은 서군이 약 8만, 동군이 약 7만 4천으로 알려져 있다. 숫자로는 서군이 근소하게 앞섰다. 게다가 서군은 세키가하라 주변 고지대를 먼저 점령해 지형상으로도 유리한 위치에 있었다. 이시다 미쓰나리 입장에서는 승산이 충분하다고 판단할 만한 상황이었다.
| 구분 | 동군(도쿠가와 이에야스) | 서군(이시다 미쓰나리) |
|---|---|---|
| 병력 | 약 7만 4천 | 약 8만 |
| 지형 | 평지 | 고지대 선점 |
| 주요 인물 | 도쿠가와 이에야스, 후쿠시마 마사노리 | 이시다 미쓰나리, 고니시 유키나가 |
| 전투 결과 | 승리 | 패배(고바야카와 배신으로 붕괴) |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왜 서군에 속해 있었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양자 출신으로, 명목상 서군 소속이었다. 그는 세키가하라 전장 남쪽 마쓰오야마에 1만 5천이 넘는 병력을 배치하고 있었다. 하지만 전투가 시작되기 전부터 도쿠가와 이에야스 측과 은밀히 내통하고 있었다는 것이 통설이다. 도쿠가와는 전투 이후 영지를 보장하겠다는 조건으로 그를 회유했다고 전해진다.
배신의 순간, 전투는 어떻게 뒤집혔나
전투가 시작되고 몇 시간이 지나도록 고바야카와는 산 위에서 관망만 할 뿐 움직이지 않았다.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이 지연에 초조해져 고바야카와 진영을 향해 총포를 쏘게 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진다. 이 자극에 못 이겨 고바야카와는 마침내 산을 내려와 서군 측 오타니 요시쓰구 부대를 공격했다. 서군 내부에서 갑작스러운 배신이 터지자 대열은 순식간에 무너졌고, 이를 신호로 다른 동조 세력들까지 등을 돌리면서 서군은 총붕괴했다.
전투 이후 승자와 패자는 어떻게 갈렸나
이시다 미쓰나리는 도주했다가 붙잡혀 교토에서 참수됐고, 앞서 다룬 고니시 유키나가도 같은 운명을 맞았다. 반면 배신으로 승기를 만든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전후 영지를 확대받았지만, 불과 2년 뒤인 1602년 급사했다. 이 죽음을 두고 서군을 배신한 데 대한 업보라는 소문이 당시부터 돌았다고 전해지나, 이는 사료로 입증된 사실은 아니다.
세키가하라 승리가 만든 것 — 에도 막부
세키가하라 전투 승리로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사실상 일본 전역의 실권을 장악했다. 1603년 그는 정이대장군에 임명되며 에도 막부를 열었고, 이 체제는 1868년 메이지 유신까지 260년 넘게 이어진다. 하루의 전투가 이후 일본 근세사 전체의 방향을 결정지은 셈이다.
자주 묻는 질문
Q1. 고바야카와 히데아키는 왜 처음부터 동군에 서지 않았나?
도요토미 가문과의 관계, 서군 주요 인물들과의 친분 때문에 명목상 서군에 남아 있었던 것으로 보이며, 내통 사실이 알려질 경우의 위험도 고려했을 것으로 추정된다.
Q2. 세키가하라 전투는 하루 만에 끝났나?
본격적인 교전은 9월 15일 새벽부터 정오 무렵까지, 약 6시간 안팎으로 마무리됐다.
Q3.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떻게 다른 다이묘들의 동조를 이끌어냈나?
후쿠시마 마사노리 등 도요토미 가문 출신이면서도 이시다 미쓰나리와 개인적 반목이 있던 무장들을 사전에 포섭한 것이 주효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