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월, 2026의 게시물 표시

병자호란, 인조는 왜 남한산성으로 피신했나

1636년 12월, 청 태종이 직접 이끈 군대가 조선을 침공했다. 인조의 원래 계획은 강화도 피신이었다. 그런데 그는 강화도가 아닌 남한산성에 갇혀 47일을 버텨야 했다. 이유는 단순하다. 청군의 진격 속도가 조선의 예상을 완전히 뛰어넘었기 때문이다. 정묘호란과는 다른 전쟁이었다 1627년 정묘호란 당시 후금은 조선과 형제 관계를 맺는 선에서 물러났다. 그러나 1636년 국호를 청으로 바꾼 태종은 조선에 군신 관계를 요구했고, 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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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사후, 조선 수군은 왜 급격히 약화됐나

1598년 노량해전을 끝으로 임진왜란은 막을 내렸다. 이순신이 재건한 조선 수군은 당시 동아시아 최강 수준이었다. 그런데 불과 수십 년 뒤, 병자호란(1636)에서 조선 수군은 사실상 존재감이 없었다. 무슨 일이 있었을까. 답은 '전쟁 이후 국가가 수군에 투자를 멈췄다'는 데 있다. 전후 재정 붕괴와 우선순위 변화 7년 전쟁으로 조선의 국가 재정은 바닥났다. 농지는 황폐화되고 인구는 급감했으며, 조정의 예산은 도성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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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은 노량해전에서 왜 전사 사실을 숨기라 했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서 전투 중 총탄에 맞아 숨을 거두며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마라"는 말을 남겼다고 전해진다. 왜 하필 승리를 눈앞에 둔 순간 자신의 죽음을 숨기라 했을까. 답은 전투가 아직 끝나지 않았기 때문이다. 전쟁 마지막 전투, 도망가는 일본군 1598년 8월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일본군은 총퇴각을 시작했다. 순천에 주둔한 고니시 유키나가는 퇴로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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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삼도수군통제사 복직, 그 배경 정리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두 차례 백의종군을 겪었다. 그중 결정적인 것은 1597년, 부산 왜영 공격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죄인 신분으로 전장을 떠돈 사건이다. 그런데 왜 조정은 불과 몇 달 뒤 그를 다시 통제사로 불러들였을까. 답은 칠천량 참패로 대안이 사라졌기 때문이다. 거짓 정보에서 시작된 파직 1597년 초, 고니시 유키나가는 간첩 요시라를 통해 조선에 "가토 기요마사가 특정 날짜에 바다를 건너올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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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해전, 원균이 대패한 3가지 원인

1597년 음력 7월 16일, 조선 수군은 칠천량 앞바다에서 단 하루 만에 함선 대부분을 잃었다. 이순신이 7년간 지켜온 남해 제해권이 무너진 날이다. 패배의 핵심 원인은 원균 개인의 실책보다 '무리한 출정 강요'와 '준비 없는 야간 정박'에 있었다. 이순신 파직, 원균이 통제사가 되다 1597년 초 이순신은 부산 왜영을 공격하라는 조정의 명령을 거부했다는 이유로 파직되어 한양으로 압송됐다. 후임 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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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유재란 발발 이유, 강화협상은 왜 깨졌나

1592년 시작된 임진왜란은 1593년부터 사실상 전투가 멎고 3년간 강화협상이 이어졌다. 그런데 1597년, 일본은 왜 다시 조선을 침략했을까. 답은 '협상 내용을 서로 다르게 이해했다'는 데 있다. 전쟁은 멈췄지만 끝나지 않았다 1593년 평양성 전투와 행주대첩 이후 일본군은 남해안으로 물러났고, 명나라와 일본 사이에 강화협상이 시작됐다. 명나라 측 대표는 심유경, 일본 측 대표는 고니시 유키나가였다. 두 사람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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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포해전, 이순신이 470척과 맞선 이유

1592년 음력 9월 1일, 이순신 함대는 일본 수군의 최대 근거지인 부산포를 기습했다. 상대는 사상 최대 규모인 470여 척. 왜 승산이 낮아 보이는 본거지를 직접 공격했을까. 답은 '보급로 차단'에 있었다. 한산도대첩 이후, 부산포가 남았다 7월 한산도대첩과 안골포해전으로 남해 제해권을 장악한 이순신은 일본군의 최종 근거지인 부산포를 그대로 두면 전쟁이 장기화된다고 판단했다. 부산포는 일본 본토와 조선을 잇는 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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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산도대첩, 학익진 전법으로 와키자카를 이긴 비결

1592년 음력 7월 8일, 한산도 앞바다에서 이순신 함대는 판옥선과 거북선 3척만으로 일본 수군 66척 중 59척을 격파했다. 승패를 가른 것은 병력 수가 아니라 견내량 유인 과 학익진 이라는 전술이었다. 이 글은 그 전술이 왜, 어떻게 통했는지를 답한다. 견내량이 문제였다 당시 일본 장수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73척(전투선 36척, 보조선 다수)을 이끌고 견내량 해협에 정박해 있었다. 견내량은 폭이 좁고 암초가 많아 판옥선처럼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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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은 왜 '도자기 전쟁'이라 불리나

임진왜란은 흔히 '도자기 전쟁'이라는 별칭으로도 불린다. 전쟁 자체가 도자기 때문에 일어난 것은 아니지만, 일본군이 퇴각하며 조선의 도공들을 조직적으로 끌고 갔고, 이들이 이후 일본 도자기 산업의 뿌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대표적 인물이 이삼평이다. 그는 사가현 아리타에서 일본 최초의 백자를 구워낸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왜 하필 도공을 끌고 갔나 당시 일본은 다도 문화가 무사 계급 사이에서 크게 유행하고 있었지만,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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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가하라 전투, 도쿠가와 이에야스는 어떻게 승리했나

1600년 9월 15일, 세키가하라에서 맞붙은 동군과 서군은 병력 규모만 보면 서군이 오히려 우세했다. 그런데 전투는 반나절 만에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 승리로 끝났다. 결정적 이유는 서군 내부에 있던 고바야카와 히데아키의 배신이다. 이 글은 그 배신이 어떻게 일어났고, 왜 전투 전체를 뒤집었는지를 따라간다. 동군과 서군은 왜 갈라섰나 1598년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망하자 그의 어린 아들 도요토미 히데요리를 보좌하던 다섯 다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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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니시 유키나가, 노량해전 이후 어떻게 됐나

고니시 유키나가는 1598년 노량해전 당시 이순신의 매복을 피해 순천 왜성을 빠져나가는 데 성공했다. 하지만 살아서 돌아간 일본에서 그를 기다린 것은 2년 뒤의 참수형이었다. 임진왜란 선봉장이었던 그는 왜 조국에서 처형당했을까. 고니시는 어떻게 노량 해협을 빠져나갔나 1598년 11월 19일, 이순신과 진린의 조명 연합 함대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구원 함대를 노량에서 요격하는 동안, 고니시는 이 틈을 타 순천 왜성에서 배를 출발시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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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해전, 이순신은 왜 죽음을 피하지 않았나

1598년 음력 11월 19일, 이순신은 노량 앞바다에서 전사했다. 이미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그해 8월 사망하면서 일본군 전체가 철수하던 상황이었다. 굳이 싸우지 않아도 전쟁은 끝나가고 있었다. 그런데도 이순신은 퇴각하는 일본군을 끝까지 추격했다. 이 글은 그 선택의 배경을 따라간다. 도요토미 히데요시 사망 후 상황은 어땠나 1598년 8월 18일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병사하자 일본은 조선에 주둔한 모든 병력의 철수를 명령했다. 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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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순신 백의종군, 파직 이유와 복귀 과정

이순신은 임진왜란 중 두 번 백의종군했다. 첫 번째는 1587년 녹둔도 전투 패전 책임이었고, 두 번째는 1597년 통제사 자리에서 파직당한 뒤였다. 특히 두 번째 백의종군은 칠천량 참패와 명량해전 승리 사이에 놓인 사건으로, 이순신 개인사에서 가장 극적인 국면이다. 이 글은 그 파직의 실제 원인과 복귀까지의 과정을 따라간다. 부산 왜영 방화 사건이란 무엇인가 1597년 초, 일본 장수 가토 기요마사가 조선으로 다시 건너온다는 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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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천량 해전, 원균은 왜 대패했나 — 판옥선 전멸의 원인

1597년 음력 7월 16일, 원균이 지휘하던 조선 수군 함대는 칠천량에서 하루 만에 사실상 궤멸했다. 판옥선 100여 척 중 살아남은 배는 12척에 불과했다. 이순신이 파직되고 두 달도 안 돼 벌어진 이 패배는 어떻게 일어났을까. 원인은 지휘관 개인의 실책과 조정의 무리한 명령이 겹친 데 있다. 원균은 왜 이순신 대신 삼도수군통제사가 됐나 1597년 초, 이순신은 부산 왜영 방화 사건과 관련해 조정을 기망했다는 죄목으로 파직되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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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량해전, 이순신은 12척으로 133척을 어떻게 이겼나

1597년 음력 9월 16일, 이순신은 겨우 12척의 판옥선으로 일본 수군 133척과 맞붙었다. 결과는 조선 수군의 완승이었다. 배 한 척도 잃지 않았고, 일본 측 지휘관 구루시마 미치후사(来島通総)는 전사했다. 이 글은 그 승리가 어떻게 가능했는지를 숫자와 지형, 사료로 따라간다. 칠천량 패배 이후, 이순신에게 남은 배는 몇 척이었나 명량해전 두 달 전인 1597년 7월, 원균이 이끌던 조선 수군은 칠천량 해전에서 사실상 궤멸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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홍경래의 난 정리, 10년 준비와 정주성 함락

임진왜란과 정묘호란 때 나라를 지킨 공이 있어도, 평안도 사람이라는 이유만으로 조정 요직에는 오를 수 없었다. 이런 차별에 대한 누적된 분노가 1811년 홍경래의 난으로 폭발했다. 몰락 양반 홍경래가 10년을 준비해 일으킨 이 봉기는 청천강 이북을 순식간에 장악했지만, 결국 정주성에서 5개월 만에 무너졌다. 표로 보는 홍경래의 난 구분 내용 주도자 홍경래(1780~1812), 우군칙, 이희저, 김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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